<지구촌X세대>15.체코-60~70년대 청년문화 간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보헤미안이란 말이 있다.자유와 내면세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뜻한다.체코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나라 신세대들의 오늘날의 모습이 그러하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프라하의 국립 카를대학 주변 골목은 소규모 연극공연장과 화랑으로 바둑판을 이룬다.그 주위를 배회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60년대 히피를 연상시킨다.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대를 물려 입은듯한 철지난 양복.금요일저녁 이들을 불러모으는 곳은 화려한 디스코테크가 아닌 무너져가는 듯한 연극무대다.
체코 대통령 하벨이 20대때 자주 드나들던 대학 부근의 자브라들리극장은 공산주의 시절 금지되어왔던 카프카 희곡의 초연으로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누구에게나 자기 생각이 따로 있다』.
제목 자체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위험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소설은 검열이 가능하지만 배우의 눈짓은 검열이 불가능하지요.』공산주의 시절 대학생들의 유일한 안식처이던 연극이 아직도 성황을 이루는 이유를 카를대학 연극반에서 일하는 요제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연장은 입을 다문채 손짓,발짓하는 「벙어리 배우」들과 그 사이로 간간히 터져나오는 젊은이들의 폭소로 은밀한 분위기를 이룬다.거리의 법은 가혹하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던 시절 자기들끼리 모여 말없는 대화로 공범의식을 즐기던 전통이 공산주의가 물러간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빼앗긴 자유를 무대에서 찾던 60~70년대 청년문화의전통을 이나라 젊은이들은 아직도 소중히 여긴다.
프라하의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들이 말에 상당히 인색하다는 느낌을 버릴수 없다.『말,특히 좋은 말 만큼 사람을속이는게 없어요.공산주의보다 더 나쁜게 수정공산주의입니다.말껍질로 우리를 속이려 들었으니까요.』이런점에서 이들은 모스크바의젊은이들과 다르다.가정불화에서부터 3차세계대전까지 어떤 질문이라도 능숙하게 대답을 해내는 모스크바의 학생들에 비해 말 자체를 불신하는 것이 퍽 대조적이다.
체코의 유명 여배우 에바 호르스카(27)는 신세대 문화의 색깔을 침묵과 사색이라고 말한다.화려한 색이나 말보다 과묵하고 쓸쓸한 멜랑콜리적 요소를 선호하는 이나라 젊은층의 기호를 뜻하는것 같았다.
기자가 찾은 주말 저녁 그녀의 집이 그러했다.
피아노 한대 밖에 아무것도 없는 그녀의 응접실은 화려한 배우에 대해 흔히 하게 되는 상상을 뒤엎기에 충분했다.그녀가 팬들에게 사랑받는 까닭은 꾸밈없는 태도와 가식적인 것을 싫어하는데있다는게 그녀의 말이다.그녀는 연기외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하는데 작곡 중간에 침묵의 장이 섞여있는게 특색이었다.요즘 젊은층에 인기있는 「불교식 명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카를대학 동양어과에 유학중인 러시아 학생 안나(19)는유학온지 2년이 되지만 체코학생들이 자신을 집에 초대하거나 그들과 집단으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그만큼 이들은 개인적이다.반면 집단논리를 싫어하고 개개인의 의사를 존 중하는 민주적인 면이 많이 보였다.
대부분 일벌레고 공부벌레인 프라하 대학생들은 프라하 주변에 산재한 9백여개가 넘는 소규모 기숙사 독방에서 지낸다.
저녁시간은 아르바이트로 보낸다.방학에는 인근 이탈리아나 독일로 싼 전세버스를 타고 노동을 하러 떠나기도 한다.이들은 상당히 실리적이라 외양에는 별로 신경을 안쓴다.
***대학생들 방학중 해외취업 체코의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는것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민족주의다.3백년이상 오스트리아에 독립을 빼앗긴 역사의 상처가 있는데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의 민족주의는 상당히 현실적이다.한국에 다녀간 적이 있는 프라하 대학동방연구소의 토마슈(28)는 서울의 중앙청을 헐어버린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 했다며 역사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나 과거는 극복해야 한다고 나름대로의 이견을 피력했다.
또한 한국학생들이 정권이 바뀔때마다 새로운 명분으로 데모를 하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바츨라브광장은 68년 소련탱크가 짓밟은 학생시위의 현장이자 89년 공산당을 몰아낸 무혈혁명의 현장이다.
역사의 현장이지만 지금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고급 쇼핑가와 디스코데크가 들어선 상업거리로 탈바꿈 했지만 여기서도 「노는 애」들을 역시 찾아 볼 수 없다.
『체코아이들은 이상해요.웃지도 않고 무뚝뚝해요.』바츨라브 광장에서 만난 영국소녀의 지적이다.그러나 슬라브의 멜랑콜리속에 감추어진 드러나지 않는 저항정신은 서구 청소년들에게는 이해되지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