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축구대표팀 지휘봉 되찾은 허정무 감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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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22면

최정동 기자

2007년 12월 겨울 바다에서 고래를 건져 올린 사람이 MB(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말고 한 사람 더 있었다. 대한축구협회는 12월 7일 새 국가대표 감독으로 허정무(53) 감독을 선임했다. MB가 권력의 정점에 섰다면 허 감독은 한국 축구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올랐다.

“내 축구 인생 최대이자 마지막 승부”

수은주가 영하 9도까지 떨어진 25일 오후, 허 감독을 서울 시내 커피숍에서 만났다. 점심 식사를 한 다음 만나기로 했지만 허 감독은 “협회에서 이제야 회의가 끝났다”며 만나자마자 국밥집으로 달려갔다. 국밥 먹고 대통령 된 MB처럼 허 감독도 국밥을 먹으며 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새 축구대표팀 감독은 MB를 꽤 닮았다.
 
허정무의 잃어버린 7년

MB의 집권이 1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지니듯 허정무 감독의 부임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00년 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 허 감독은 여론의 포화 속에 지휘봉을 놓았다. 후임은 거스 히딩크였다.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요하네스 본프레레-딕 아드보카트-핌 베어벡의 외국인 감독 시대가 7년 동안 이어졌다. 허 감독은 외국인 사령탑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잃어버렸던 감독 자리를 7년 만에 되찾은 셈이다.
 
“모든 것을 걸었다”

회한이 없을 리 없다. 2002년의 기적을 만든 박지성·이영표·설기현·김남일·송종국 등은 허 감독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발탁해 다듬어낸 선수들이 아닌가.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 정말 기뻤다. 하지만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도 많았다.”

회한은 오기가 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는 내가 대표팀의 생리를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보다 훨씬 더 비장한 심정이다. 내 축구 인생의 최대 승부이자 마지막 승부다.”

대권에 도전하며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헌납한 MB처럼 눈에 보이는 뭔가를 내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면 허 감독은 재산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잃는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집념, 권력에 대한 강한 욕구와 승패 혹은 성패를 분명히 하고 싶은 승부사 기질은 MB와 허정무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 읽힌다.
 
대표 선수도 떨고 있다

MB는 칼을 갈고 있지만 허 감독은 벌써 칼을 댔다. 허 감독이 소집한 첫 번째 대표팀 명단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지난해 베어벡 감독이 최정예라고 선발한 아시안컵 대표 23명 가운데 김두현·염기훈·김치우·강민수·정성룡 등 5명만이 26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황재원·박원재·조성환·황지수·이동식·구자철·조진수·이종민·곽희주 등 새 얼굴을 대거 발탁, 27일부터 파주 대표팀 훈련장(NFC)에 모여 훈련을 시작한다.

허 감독의 새 대표팀에 대해 ‘K-리그에서 보여준 기량을 제대로 짚어냈다’는 기대와 ‘너무 모험적인 인선’이라는 우려가 엇갈린다. 그러나 허 감독은 “박지성·이영표가 처음부터 이름값이 있었던가”라고 물으며 “기량과 가능성에서 기존 선수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선수들이다. 조금만 경험을 쌓으면 K-리그에서 잘한 것처럼 금세 대표팀서도 적응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제2의 박지성, 제2의 김남일이 나와야 한국 축구가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이럴 땐 ‘개혁’을 외치는 MB처럼 타협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목표는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

한국은 월드컵 4강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직 한국인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승리는 없다. 허 감독의 임기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다. “외국인 감독만큼 지원을 받는다면 한국인 감독이 못할 리 없다”는 게 허 감독의 생각이다. 허 감독은 히딩크의 업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이후의 외국인 감독들은 한국인 감독들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투철하다.

허 감독은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임기고 뭐고 다 소용없는 일이다. 한 경기 한 경기에 배수진을 치겠다”고 말했다. 대표팀은 30일 칠레와 평가전을 치르고 다음달 6일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첫 경기를 벌인다. 여기서 다 이기고 싶다는 얘기다. 패배는 허 감독의 머릿속에 없다.
 
구식 축구 아닌가?

어떤 권력이든 언론 내지 여론과의 허니문 기간이 있다. 허니문 기간이기 때문에 MB의 허물과 잘못을 들먹이는 사람이 드물다. 허 감독도 못 미더운 부분이 있지만 지금은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본프레레나 코엘류 감독 부임 초기에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로 가득 차 있지만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도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한나라당의 집권 이후 일부에서는 낡은 정치로의 회귀를 걱정한다.

한때 ‘진돗개’란 별명으로 통한 허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 근성과 투혼만을 앞세우는 구식 축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선수들의 기를 죽일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가 오히려 조직 운영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있다. 흔한 말로 요즘 유행하는 ‘서번트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허 감독은 단호하다. 허 감독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봐도 체력과 정신력은 기본이며 그 위에 기술을 겸비해야 세계 축구의 흐름에 따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시간이 흐른 뒤, MB도 허 감독도 결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남아공 월드컵이 끝나는 2010년, 다음 대통령을 뽑는 2012년에 웃어야 진정한 승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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