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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콤플렉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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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대중문화계의 코드는 왕이다. 해를 넘겨 이어지는 TV 사극 열풍은 여러 왕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주몽·광개토대왕에 이어 이번에는 정조와 세종이다. 지상파 3사는 세종(KBS ‘대왕세종’), 정조(MBC ‘이산’), 성종(SBS ‘왕과 나’) 드라마를 동시 방영 중이다. 궁중 비사에 초점이 맞춰진 ‘왕과 나’ 는 예외지만, 그 외에는 ‘성군의 재조명’이 특징이다.
 
왕의 열풍은 출판계로도 번졌다. 일찌감치 주목받은 정조에 이어 최근에는 세종 관련 서적만 10여 권 쏟아졌다.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을 비교하는 학적 연구도 나왔다.
 
실존 왕이 주인공이지만 드라마들은 ‘팩션’ 형식이다. 사실(팩트)에 허구(픽션)를 더했다. 작가적 상상력의 무한 질주로 고증 문제, 역사 왜곡 시비도 나왔다. 역사 저술가 이덕일은 ‘대왕세종’에서 왕자가 대낮 길거리에서 납치되는 장면에 대해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최소한의 시대적 개연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반대 견해도 있다. 김기봉 교수는 “사실은 진실이고 허구는 거짓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근대 사실주의가 만들어낸 매트릭스”라며 “팩션이라는 신조어의 탄생은, 근대 사실주의적 역사관이 해체되는 증표”라고 말했다. 현재적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 역사의 존재 의미라는 점에서는, 팩션이나 정사나 충분히 ‘역사적’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드라마 속 왕들은 권위의 제단에서 내려와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애틋한 사랑을 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온갖 정치적 음모와 싸운다. 로맨스는 웬만한 청춘 멜로 못잖고 음모술수는 ‘하얀 거탑’ 뺨친다. 물론 결말은 모든 고난을 이긴 왕의 승리다. 고난 끝에 왕좌에 올라 큰 정치를 펼치는 왕들의 영웅담이다.
 
최근 왕 드라마들의 인기는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반영한다. 판타지 사극 ‘태왕사신기’도 마찬가지다.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인간적이고, 백성을 사랑하며 정치가로도 프로급인, 팔방미인 리더십이 주제다. 언뜻 보면 소탈해 보여도 능력과 인간미, 정의로움과 매력을 두루 갖춘, 완벽하고 영웅적인 왕의 이미지다.
 
어찌보면 한국 사회는 말로는 제왕적 리더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그런 영웅적 리더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만 바뀌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모든 문제는 대통령 1인에게서 나오며, 시스템보다는 대통령의 성정을 중시하는 대중심리의 근간에도 이런 메시아 콤플렉스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