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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지식의 바다엔 책들이 많지만 … ‘월책’을 낚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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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여기 두 남자가 있다. 나이도, 사는 모양도 참 다른데 딱 하나 닮은 점이 있다. 유별난 지식욕이다. 한 남자는 대학 때 자신이 제법 지적이라고 자부하다가 직장인이 되고서는 책과 담쌓고 살던 남자다. 그러던 그가 종합적인 지식을 쌓아보겠다고 독한 맘먹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완독에 도전했다. 반면 또 다른 남자는 그 사람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자다. 평생을 다독하며 지독한 ‘책벌레’로 살았다. 20대 후반부터 사들인 책의 무게 때문에 방이 꺼진 적도 있단다. 이들이 각기 쓴 『한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은 읽는 방식과 글쓰는 방식까지 ‘극과 극’으로 다른 두 남자의 지식 편력기다. 독서를 통해 읽는 재미, 배우는 삶의 즐거움을 만끽한 두 남자의 책을 소개해본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A. J. 제이콥스 지음
표정훈 외 옮김, 김영사
663쪽, 2만5000원

 우선 책 제목에 혹하지 말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어떤 책인가. 1768년 영국에서 탄생한 이 백과사전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으로 꼽힌다. 32권, 3만3000쪽, 6만5000개 항목, 4400만 단어(영어판)이니 분량도 만만치 않다. 인류 지식의 집약판이라 할 이 전집을 한 권으로 읽겠다면 얌체, 읽을 수 있다고 믿으면 바보일 게다.

 그렇다고 부제(副題)에 지레 겁먹지도 말자.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남자의 가공할 만한 지식탐험’? 이거 뻥이다. 그런 거창하고 진지한 지적 여정이 아니다. 원제가 ‘아는 체 하는 사람(Know-It-All)’이다. 지은이가 직장에서 기획회의 할 때는 물론 아내와 키스할 때까지 사전에서 읽은 사항을 떠올리거나 읊는 병통을 꼬집는 제목이다.
 

미국 명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30대 중반의 지은이는 대중잡지에서 일하다 보니 지식의 구멍이 뚫린 것을 느꼈단다. 이를 메우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를 독파하기로 한다. 일년에 걸쳐 전집을 읽으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췌하고 감상을 모았다. 여기에 아내의 임신, TV 퀴즈 쇼 출연 등 그간 겪은 주변 일을 더한 일종의 독서일기이다. 어지간한 유머 소설 뺨칠 만큼 재미있으니 가벼운 기분으로 아무데나 펼치면 된다.

 ‘스트라빈스키’ 항목.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이 1913년 파리에서 초연됐을 때 불협화음을 못 견딘 관중들이 난동을 벌인 사실을 전하면서 “그 사람들이 (열 두 살 때 만든)내 ‘작품’을 들었다면 극장에 불질렀겠다”고 익살을 떤다. 해산물 굴이 수온에 따라 성별(性別)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내 그럴 줄 알았지. 온탕은 어쩐지 남성을 남성답지 못하게 만든다고”하고 촌평하는 식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사시(斜視)여성에 끌렸고, 수세식 변기는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대자(代子)였던 존 해링턴 경이 발명했으며,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는 13살 짜리 사촌과 결혼했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마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개선행진’이란 항목이 그렇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개선행진은 5000명 이상의 적을 죽인 장군에게만 허용됐는데 이 때 노예가 절정의 영광에 있는 장군에게 황금관을 씌워주며 “장군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이라고 상기시켜 주었단다. 이처럼 요즘에도 제법 귀담아 들을 만한 대목이 수두룩하다.

 물론 지은이도 인정했듯이 브리태니커를 모두 암기한다 해도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 독서일기를 읽는 것은 ‘돈 안 되는 일’이자 ‘쓸모 없는 지식’의 추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랴. 이 책을 읽고 나니 브리태니커 백과를 사고 싶어지니. “지식과 지적 능력이 같지 않다는 걸 알지만 다시 한 번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지은이의 소감에 공감한 덕분일까.

김성희 고려대 초빙교수·언론학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청어람 미디어, 631쪽, 2만3000원

얼마 전 국내 한 신문에 워싱턴포스트지의 서평전문기자 마이클 더다(Michael Dirda· 60)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31년 째 같은 일을 해오고 있는 그는 1,2층과 3층 다락은 물론 지하창고까지 온통 차지하고 있는 책에 묻혀 살며 “서재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추구하는 지 보여주는 나 자신”이라고 했다. 집안을 통틀어 장서는 대략 1만5000권.

 하지만 더다도 책에 관한 한 “형님”할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일본이 자랑하는 ‘지(知)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이다. 그의 장서는 줄잡아 3만5000권. 오로지 책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고양이 빌딩(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옆벽면에 고양이얼굴이 그려져 있다)’조차도 공간이 모자라 인근에 몇 개의 맨션 룸을 빌려 쓰고 있을 정도다. 한마디로 ‘책광(冊狂)’인 그는 인문· 정치· 사회분야는 물론 우주, 진화, 뇌과학 등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저술하는 유명한 ‘글쟁이’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비롯해 『읽기의 힘, 듣기의 힘』『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등 그의 저작이 10종 이상 소개되어 글줄이나 읽는 이들 중엔 팬들도 상당히 많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책은 일본 『주간문춘(週刊文春)』에 연재된 ‘나의 독서일기’ 2001년 3월 15일호부터 2006년 11월 2일 호까지의 수록 분을 뼈대로 구성된 것으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1992~1995년 분)』『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재미없는 책(1995~2001년 분)』의 후속 작이다. 책은 1부에 독서편력을, 2부에 최근 서평을 싣고 있는데, 2부에 실린 감칠 맛 나는 서평도 그렇지만 1부의 내용이 주는 울림이 훨씬 크다.

 이 책에서 그는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문예춘추에 입사한 24살 때부터 34살 때 쓴『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10년간의 책 읽기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문춘 기자를 하면서 “마음껏 책을 읽고 싶어” 사직을 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서를 했다는 것이다. 그의 독서는 몰아치기 방식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와 관련한 호기심으로 400여권의 관련서적을 읽고 기독교 관련해서는 500여권을 읽어대는 식이다.

 그는 좋은 책을 한 권 쓰려면 최소한 100권 쯤 읽을 것을 주문한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입·출력비’가 100대 1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자예프, 비코, 비트겐슈타인 등을 만나면서 사유의 지평이 바뀌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책을 따라가다 보면 독서를 통한 그의 박식함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더 읽고 싶은 책이 계속 나타난다면 그 자체가 지적인 인간에게 있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그 욕망이 사라진 사람은 지적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며 “결과적으로 문명세계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훈계에는 정신마저 번쩍 든다.

이만훈 기자,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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