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7가] '지천명'이 내일모레 이거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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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커 보였습니다. 적어도 소인배는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직도 나는 야구장에 있다"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임종 당일도 등판해 통산 340승을 영전에 바쳤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마흔 셋을 넘기면서 해마다 시즌 중반 이후 팀에 합류했지만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선 성조기를 달고 출전했습니다. 월드시리즈 같은 큰 경기에선 '장기'인 빈볼을 던지고도 당당했습니다. 오히려 부러진 방망이가 날아오자 되집어 던지는 역발산(力拔山)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팬들은 제일 늦게 계약하고도 최고 연봉을 받아온 그를 질타하기는커녕 뜨거운 기립박수로 환영했습니다.

로저 클레멘스. 사상 최다 사이영상 7회 전무후무한 한 경기 20탈삼진 두 차례 354승의 현역 최다승…. 그에게 붙은 훈장들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불과 24세였던 1986년 올스타 게임 MVP와 사이영상에 이어 리그 MVP까지 휩쓸어 행크 애런이 "투수가 MVP가 돼선 안된다"고 하자 그는 "애런이 아직도 선수라면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투수인지 보여주기 위해 그의 대갈통을 깨버렸을 것이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색인종 선수들이 휘어잡고 있는 메이저리그에서 카리스마가 넘쳐흐르는 마지막 백인의 영웅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요. 지난달 중순 메이저리그의 금지약물 복용 실태를 일부나마 드러낸 미첼 리포트가 발표된 이후 그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과연 '마지막 백인의 영웅'이라고 해도 타당한가라는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한 때 단짝이었던 트레이너의 유효 만료된 아랫도리 이야기를 들춰내지를 않나 자신을 영웅으로 흠모하는 그의 아픈 아들이 격려의 말을 듣고 싶다는 문자메시지에서 비롯된 전화 통화를 몰래 녹음해 공개하지를 않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리즈의 연속입니다. 물론 클레멘스도 자신의 얼굴에 약물의 검은 수건이 드리워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방법론적으로도 자가당착의 악수에 불과합니다. 진실 게임의 예정지가 늘 파국이라고 하더라도 지난 24년간 마운드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멀찌감치 엇나간 추태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몸쪽 승부를 가장 잘하지만 빈볼도 곧잘 던져 '헤드 헌터'라고 불리고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한 연례행사로 치부되고 있는 은퇴 번복 다른 선수들보다 더 우대를 받고싶어 하는 잦은 불평과 특별대우 요구 등등)를 고착화시키는 자충수가 될 게 뻔합니다.

클레멘스는 도덕적으로도 정황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먼저 거짓말을 했습니다. 미첼 보고서가 발표되기 전까지 자신이 명단에 오른 사실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첼의 면담 요청을 두 차례나 거절했고 사립탐정도 고용해 친구 트레이너와 사전 접촉 인터뷰도 해갔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 중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 명예훼손 고소장에 올렸습니다. 이 테이프엔 친구 트레이너가 그의 약물복용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증언도 담겨 있어 친구 트레이너의 변호사들은 법정 공개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이미 미첼 보고서에서 친구 트레이너가 클레멘스에게 직접 여러 차례에 걸쳐 윈스톨 등 금지약물을 주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바늘과 실'이라고 해도 좋은 친구 앤디 페티트는 일찌감치 약물복용을 시인했습니다.

그럼에도 클레멘스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발코 스캔들로 빼도 박도 못하는 배리 본즈와 달리 아직까지 아무런 물증이 없어 자신만만 하고 본즈의 죽마고우 그렉 앤더슨처럼 페티트의 입도 끝까지 자크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인가요.

뭐 낀 놈이 더 성낸다는 속담에 딱 어울릴 법한 클레멘스는 마크 맥과이어는 물론 본즈보다 더 나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본즈는 모르고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약물복용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클레멘스는 8월4일이 되면 만으로 마흔여섯 살이 됩니다. 불혹의 고개를 넘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 오십이 내일모레입니다. 고무줄 놀이하다 싸우는 계집아이들처럼 말싸움이나 하면서 진흙탕에서 나뒹굴게 아니라 맑게 갠 하늘 아래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미주중앙 구자겸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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