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워치] 리틀 후진타오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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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 정가에 6세대 지도자 그룹이 부상하고 있다. 주축은 1960년대생들이다. 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대학에 들어간 세대다. 다섯 명이 장관급에 올랐다. 60년 출생한 저우창(周强) 후난성 성장을 필두로 61년생인 장칭웨이(張慶偉) 국방과학공업위원회 주임과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 신장위구르자치구 주석, 63년생인 후춘화(胡春華)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 쑨정차이(孫政才) 농업부장 등이다. 이 중 후춘화는 ‘리틀 후(후진타오)’로 불리며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왜 그럴까.

 17일 오후 4시30분. 베이징 첸먼(前門)의 둥다(東大)가에 위치한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본부 5층 접견실. 입가에 다소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이가 들어선다. 좀처럼 외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후춘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다. 남경필 의원을 단장으로 한 한국국제문화교류중심 일행과 한·중 청년 교류 방안을 논의하면서도 미소는 떠나지 않는다. 상대 말을 우선하고 경청하는 배려와 겸손이 눈에 띈다. 그러나 미소 속에서도 일행 전체를 명단과 일일이 대조하며 챙기는 꼼꼼함이 엿보인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조용히 때를 기다려온 젊은 날의 후진타오 주석이 후춘화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를 리틀 후라고 부른다. 공청단 출신에, 티베트 오지 근무를 한 것 등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 말 속엔 후진타오 주석처럼 권력의 정상에 설 것이라는 기대도 담겨 있다.

 후춘화는 63년 4월 후베이성 우펑(五峰)현에서 태어났다. 우펑현은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 자치현이다. 6남매 중 넷째. 매일 6㎞ 떨어진 학교를 오가며 공부해 발바닥엔 동전 같은 굳은살이 박였다. 16세 때 현 전체에서 문과 수석을 차지하며 베이징대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49년 신중국 건국 이래 현이 배출한 첫 베이징대 학생이었다. 그러나 후춘화는 삽과 광주리부터 들어야 했다. 수력발전소 현장에서 여름 한철 일해 모은 100위안과 가난한 농부인 부친이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더해 학비를 마련했다.

 대학 때 별명은 ‘꼬맹이’. 어린 나이에 입학한 데다 체격도 왜소해 붙여진 것이다. 그는 학과 공청단 일을 맡으며 당시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있던 리커창(李克强)과 인연을 맺는다.

리커창은 지난해 17차 당 대회에서 서열 7위의 정치국 상임위원에 오른 인물. 차기 총리감으로 꼽힌다. 후춘화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은 건 83년 졸업과 함께다. 성적이 좋아 베이징에서 안정된 직장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는 티베트 오지 근무를 자원한다. 이 사실이 리커창에 의해 당시 공청단 상무서기이자 중화전국청년연합회 주석으로 있던 후진타오에게 보고된다. 이어 광명일보(光明日報)에 후춘화는 80년대 중국 젊은이의 역할 모델로 그려진다.

 후춘화는 이후 후진타오와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 크게 세 단계다. 첫 단계는 89년 봄. 티베트에 폭동이 발생하자 당시 티베트 서기인 후진타오는 후춘화를 부른다. 능력과 신뢰도를 본격적으로 점검하는 계기다. 두 번째는 94년. 당 중앙이 ‘제3차 티베트 업무 좌담회’를 개최할 때 회의를 주재하게 된 후진타오 당시 정치국 상임위원은 또다시 후춘화를 찾는다. 세 번째는 96년. 당시 중앙당교 교장으로 있던 후진타오는 후춘화를 당교로 불러 고급 간부로 양성한다.

 후춘화가 이처럼 후진타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된 것은 티베트 변방에서 근무하며 쌓은 실력 덕분이다. 84년 ‘티베트 청년보’를 창간하고, 85년엔 라싸 호텔 인사부에서 일하며 적자투성이의 호텔 개혁에 앞장선다. 92년엔 지세가 험난한 도로 공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보름간 동굴 생활을 한다. 말린 떡을 먹고 눈 녹인 물을 마시며 악착을 떤 끝에 임무를 완수한다.

후진타오 주석으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후계 그룹에서 탄탄한 기반을 쌓고 있는 후춘화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 [김민관씨 제공]

83년부터 20여 년의 티베트 근무 중 75개 현 가운데 60개 현을 찾았다. 티베트 말을 하고, 티베트 술을 마시며, 티베트 춤을 춘다. 체력적으로 20년 이상을 티베트에서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티베트는 산소가 부족한 고원지대로 한두 해의 생활만으로도 몸이 망가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도 티베트 근무 기간 잦은 병치레로 큰 고생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후춘화는 이 기간 정치학·경제학·민족학·역사학·경영학 등 각 분야 전문 서적 200여 권 이상을 탐독하며 지식 늘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티베트 발전 방향에 관해 발표한 논문만도 30여 편이 넘는다. 그의 지식 쌓기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그가 모교인 우펑 고교 잡지 ‘문심(文心)’에 남긴 글을 보면 그의 생각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는 제하의 글에서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실천할 용기가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다”고 적고 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 노력하는 후춘화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나는 대목이다.

 중국엔 인재가 많다. 이들이 발탁되기 위해선 우선 베이징 간부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그리고 검증을 받는다. 쉬운 시험을 통과하면 보다 비중 있는 일에 중용돼 또다시 검증을 받는다. 몇 차례나 반복되는 이 같은 ‘권위 있는 확인’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비로소 지도자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중국 전문가들은 후진타오 주석이 후춘화를 민족문제 전담인 민족사무위원회 간부로 발탁하지 않고 공청단 최고 지도자로 선발한 것은 대임을 맡기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한다.

 오는 5월엔 제16차 공청단 전국대표대회가 예정돼 있다. 대권을 향해 전진하는 후춘화의 행보가 어디로 옮겨질지 관심거리다.

 유상철 기자

◇공청단=1920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으로 창단된 뒤 25년 공산주의청년단으로 이름이 바뀐다. 공산당 영도 아래의 청년 군중 조직으로, 실천을 통한 공산주의 학습이 목표다. 단원의 나이는 14~28세. 28세가 되면 간부직을 맡지 않는 한 단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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