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대학교>11.비효율적 대학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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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서울대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 김창식(金彰植.26)씨는 밤10시만 넘으면 하던 연구를 대충 정리하고 연구실을 떠날 준비를한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건물은 밤11시가 되면 출입문이 일제히 잠기고 밤10시30분쯤부터는 수위들이 각 건물을 돌며 연구실.실험실에 남아 연구에 몰두하던 대학원생들에게 귀가를 종용하기 때문이다.일과시간중에 학과장의 서명을 받아 유숙계 (留宿屆)를 제출하면 연구실 잔류가 허용되기는 하지만 연구.실험일정이라는 게 소요시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어서 사전에 유숙계를 내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때문에 막상 전산작업이나 실험 도중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에는 아무리 사정이 다급해도 실험기기 등의 전원을 끄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유숙계를 낸 학생이 예정보다 일찍 작업을 끝내더라도 출입문을 열어 주지 않기 때문에 냉.난방도 되지 않는 연구실에서 새우잠을 자는 수밖에 없고,심지어 어떤 학생은 창문을 열고뛰어내리다 다친 일도 있다.
24시간 개방되고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할 연구실 출입이밤11시면 통제되고 더 남아 공부하려는 학생마저 행정편의에 밀려「쫓겨나가는」현실이「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는 서울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학행정의 1차적인 역할은 연구.강의활동에 대한 지원과 서비스제공.그러나 서울대의 행정이 제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교수.학생은 거의 없다.오히려「행정」이「교육」과「연구」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 교수.학생들의 오랜 불만이다.
방학이 아닌 학기중에 교수가 해외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승인 서류는 학과사무실에서 전결권자인 부총장까지 10단계를 거쳐 도장을 찍도록 돼 있고 그나마 여행기간도1주일로 제한돼 있다.
해당학과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학과장의 권한으로 위임하면 번거로운 절차와 시간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교수들의 지적이지만「위임.전결규정」에 묶여 개선되지 않고 있다.
본부에서 행정조교를 맡은 적이 있는 공대 박사과정 張모씨(28)는『사소한 서류하나를 처리하는 데도 결재도장이 예닐곱 개는기본적으로 찍혀야 하고 중간단계에서 담당자가 휴가.출장 등으로자리를 비우면 돌아올 때까지 처리가 안된다』며 『서울대행정은「時테크의 사각(死角)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감사원이 실시한 국공립대 조직.재정운용에 대한 감사결과에 따르면 사립대에 비해 국립대의 보직교수비율이 높고 행정조직이 비대한 것으로 지적됐다.서울대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에서 수업시간을 감면받는 보직교수는 전체교수의 19.7%인 2백73명.이들이 감면받는 강의시간은 전체의 10%를 웃돌며 이는 결국 평교수들의 추가부담으로 돌아가 가뜩이나 교수가부족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서울대의 일반직원수는 이사관 1명,서기관 23명,사무관 50명을 포함해 모두 1천5백18명으로 전체교수 1천3백89명보다더 많은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기능직등을 제외한 사무직원 1인당 학생수는 59.1명으로 연세대 등 주요사립대 평균 98.9명,18개 국.공립대 평균 70.8명과 대조적이다.
서울대 예산중 인건비비율은 54%정도.정밀한 업무분석을 통해방만한 기구를 축소하고 교직원을 줄여「군살」을 빼면 절감되는 예산을 열악한 교육여건 개선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게 감사의 결론이었다.
한 전임(前任)본부보직교수는『서울대 직원들의 점심시간은 11시반부터 시작돼 2시간정도 계속되고 일과시간중에도 컴퓨터게임을즐기는 직원들이 많다』며『민간기업의 경영기법을 도입한다면 행정직원을 지금의 3분의 1로 줄여도 업무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교수들은 서울대의 의사결정구조가 관료화돼 있다고 지적한다. 외국대학들처럼 평교수.학생.동문 등 학내구성원들의 의견을수렴하는 절차와 관행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은 탓으로,대학전체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항인데도 결정과정에서 대다수 교수가소외되고 사후 공문을 통해 일방적인 지시.전달만내 려온다는 것. ***평의원회 이름뿐 93년4월 시작된 제2공학관 증축공사가 대표적인 사례.지난 학기에 열린 한 공청회에 참석한 교수들중 많은 이들이『하루아침에 관악산 중턱이 깎이고 숲이 잘려 나가 경관을 크게 훼손,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사전에 알고 있었던 교수 는 얼마되지 않았다』며『권위주의정권때나 있을 법한일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서울대에서 벌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학칙상 최고의결기구로 평의원회가 있지만 제기능을 못하고 실질적인 최종 의결.심의기구인 학장회의도 이미 본부에서 결정된 사 항을 보고받고 통과시키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도 수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명문대들은 모든 학사업무 결정이 철저히 학과교수회의 중심으로 이뤄지고 재정운영도 학과단위부터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대학본부에 집중된 권한을 학과와 단과대학으로 대폭이양해 학문단위별로 특성에 맞게 행정이 이뤄지고 의사결정과 집행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지난달 신임총장선거에서 대학행정의 非효율성.非민주성을 비판한 5명의 후보들이 한 목소리로 내놓은 처방이다.
〈특별취재반〉 ◇도움말 주신 분▲李俊求 서울대사회대교수▲金濟琬 서울대자연대교수▲白喜英 서울대가정대교수▲李基俊 서울대공대교수▲金光雄 서울대행정대학원교수▲丁世鎭 서울대교무과장 〈다음회에는「연구소와 연구비」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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