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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경이 만난 사람] “노무현·이회창 정치 데뷔시킨 것 내 인생에서 큰 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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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내가 인간이 되라고 했는데… “昌은 흉측한 사람”
■ “‘독재자 딸 안 된다’는 신념으로 MB 밀었다”
■ MB에게 “한반도 대운하 무리하게 추진하지 말라”
■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는 개혁 아닌 혁명
■ “경쟁에서 진 사람은 깨끗이 물러날 줄 알아야…”

지난 대통령선거의 또 다른 관심거리. YS와 DJ, 두 전직 대통령 간의 장외싸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YS에게 돌아갔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YS. 최근 팔순 잔치를 치른 그의 속내를 <월간중앙>이 단독으로 들었다.


이번 17대 대선에서는 두 개의 대전이 동시에 벌어졌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야·야 대권 후보들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50년 정적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 사이에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대접전이 펼쳐졌다.

양 김씨는 전직 대통령들이 흔히 해오던 후방의 모호한 ‘지원사격’ 수준을 벗어나 전방 야전사령관으로서 대선전에 직접 뛰어들었다.

승자는 YS였다. 범여권 후보들을 불러 통합을 진두지휘하고,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이 난다는 위험수위의 발언까지 했던 DJ는 대선 막바지에 패색이 짙자 입을 닫았다.

이번 대선에서 YS의 활약 역시 DJ 못지않았다. 한나라당 내 경선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던 이명박 당선인을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이 당선인의 대권 출정식이었던 2007년 3월13일 일산 킨덱스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해 2시간이 넘게 진행된 행사장을 끝까지 지키며 지지 입장을 확고하게 보였다.

또 민주계 출신으로 박근혜 전 대표 쪽의 좌장 격이었던 김무성 최고위원을 상도동으로 불러 윽박지르기도 하고, 다른 대선 후보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한편 이 당선인이 힘겨워할 때마다 격려하며 안팎을 다독였다. 이 당선인은 지난 1월11일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YS의 팔순 잔치에 참석해 적극적인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인까지 참가한 이 자리는 ‘YS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를 비롯해 정원식·이홍구 전 국무총리 등 문민정부 시절 고위 각료,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등 상도동 핵심 인사까지 600여 명이 함께 모여 축배를 들었다.

그 며칠 후인 1월14일 있었던 민주동지회 신년하례회 겸 팔순 잔치에서도 수백 명이 다시 모인 민주계는 다시 찾은 ‘상도동의 봄’을 자축하는 듯 잔칫집 분위기였다. 지난 10년간 칩거해온 YS는 정권교체에 성공한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지난 1월15일 상도동 자택에서 YS와 대선 이후 첫 공식 인터뷰를 했다. 이 당선인이 보낸 세 개의 난(蘭)이 다소곳이 자리 잡은 응접실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아침에 시작해 점심식사가 끝난 이후까지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는 줄곧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요즘 돋보기도 없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눈까지 밝아졌다고 한다.
그의 속내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가능한 한 그가 쓰는 언어를 그대로 옮긴다.

■ 인터뷰 제1막 -YS의 부활
“MB 당선되고서야 국내 방송 켰다”

YS의 50년 정치역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은 그가 민주화투쟁 과정으로 분류하는,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로 대권을 잡는 데 성공하기까지의 35년이다.

그리고 1993년에서 1998년 2월까지 대통령 재임기간 5년, 또 퇴임 이후 현직 대통령들에 의해 공격받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10년 세월이 될 것이다.

먼저 그가 지난 10년을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했다.

-이명박 당선인을 비롯한 많은 정치권 인사가 참석해 성대하게 치러진 지난 1월11일 팔순 잔치는 각 신문의 1면을 차지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이어 14일 민주동지회 신년하례회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민주계의 재결집이 눈에 띄었고요. 지난 10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내가 보기에는 세계에서 보기 힘든 잔치였을 것 같아요. 김덕룡·김무성·홍인길·김수환·박관용 다섯 사람이 앞장서서 해줬어요. 김대중·노무현 10년 동안 나는 TV를 안 봤어요. 그런 것 보면 건강에 해로워서 그랬어요.

“노무현·이회창은 내가 잘못 픽업”

아예 NHK로 채널을 맞춰 놓고 있었고, 신문만 <중앙><조선><동아> 세 개를 봤어요. 세계적으로 팔순 잔치를 그렇게 크게 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몹시 흐뭇한 모습) 두 해 전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치매에 걸린 채 팔순 잔치를 하는 사진이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걸 봤는데 안타까웠지요. 그 즈음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도 답이 없어요. 치매라서 그런 것 같아요.

대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내가 1992년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선거를 할 때 한·영협회(당시 회장은 고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초청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어요. 대처를 만났더니 ‘한국에는 대통령후보 TV토론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상대 후보(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하도 하자고 해서 하려고 한다니까 여론조사에서 8% 앞서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건데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고 만류하더군요. 지는 후보가 상처를 주려고 하자는 건데 왜 응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당시 언론은 과거에 없었던 TV토론을 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을 때였어요. 대처 말 듣고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대변인을 하던 김중위 전 의원을 불러서 안 하는 방향으로 지시했죠. 그 일로 김대중과 신문에 엄청나게 공격당했어요.

그런데 선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요. 선거 이슈가 계속 바뀌니까 결과는 8% 그대로 이겼어요. 4만 표 모자란 200만 표 차이로 이겼지요. 그 당시로 보면 큰 승리였어요. 그 후 대선에서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이회창에게 20만~30만 표 정도 차로 이겼어요. 정주영(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나와서 내 표 다 갈아먹고도 그랬지요.”

-언제부터 TV를 다시 보기 시작하셨나요?
“당선인 발표하는 날부터 보고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비서들에게 한국 TV 좀 틀어보라고 했더니, 못 틀더라구요. 그 동안 아예 고정돼 있어 채널을 찾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술자 불러 고쳤어요.
전두환 때는 TV와 신문을 10년간 안 봤어요. 건강에 아주 나빠서 그랬지요.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10년간 또 TV를 확실하게 안 봤어요. 그래서 TV는 20년간 안 봤네요. 나는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도 만나지 않고요.”

-지난 10년간 상도동을 찾는 발걸음이 뜸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요즘 변화한 분위기에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 만나면서 아휴, 참 ‘빠르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뭐 좀 해보려는 욕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축하인사를 했습니까?
“그 사람 부르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안 오는 게 여러 사람 보기에 좋아요. 내 건강에도 안 좋구요.”

-이번 대선 출마, 자유신당 창당 등 이 전 총재의 최근 정치 행보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인간이 되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야, 놀랐어요. 그렇게까지 될 줄(탈당 후 대선 출마) 몰랐어요. 나는 ‘그 사람’이 출마선언했을 때 중도포기 안 할 줄 알았어요. 일반 국민이 그 사람 대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됐어요. 내가 대통령 됐을 때 모든 신문이 차기 대법원장으로 이회창을 지목했는데, 대법원장은 인간 생사를 결정하는 일이라 절대로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거론되지도 않았던 윤관을 시켰지요.”

이 전 총재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감정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다. 대법관이었던 그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이어 감사원장·국무총리로 기용했고, 1996년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불러내면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 후 신한국당 경선에서 민주계와 민정계의 지지로 소위 ‘9룡’을 제치고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위치가 되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대선을 치렀다. 그 일 이후 상도동과는 완전히 결별한 셈이다.

죽은 김동영이 최고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께서 키워낸 정치인들이 현재 여·야를 망라해 정치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을 비롯해 노무현 대통령, 이 당선인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 또 통합신당의 손학규 대표, 보수세력의 부활을 꿈꾸는 이 전 총재…. 모두 김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인사들인데,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맞아요. 전부 내가 기른 사람들이지요. 손학규만 해도 교수일 때 픽업해서 국회의원·경기도지사까지 시킨 사람이 대선까지 나왔지요. 또 노무현·이회창도 픽업한 사람들인데, 나도 인생에 후회하는 일이 별로 많지 않은데, 이 두 사람 픽업은 정말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손 대표의 한나라당 탈당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 잘못된 일이었죠.”

-이번 대선에서 1% 지지도 못 받고 또 실패한 이인제 민주당 의원은 어떤가요?
“이인제는 지나가는 사람이고….”(안중에 없다는 반응이었다.)

-정치후학 중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죽은 김동영 전 의원이지요.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말하기 곤란하네요.”

-노 대통령도 곧 전직 대통령이 되는데,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퇴임 후 살 집을 어떻게 그렇게 크게 짓습니까? 노무현은 고향 땅 2만 평에 집을 지었다고 하니 정신이 나갔지요. 난 대통령 되기 전부터 살아온 101평짜리 이 집의 대지 한 평 늘리지 않고 돌아왔어요.

두 사람은 어째서 그런 큰집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퇴임 후 이 집을 찾은 주요 외국 인사들이 아시아 주요 지도자 집을 가봤지만 이렇게 작은 집에서 사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는데, 난 이것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거실에는 8년 전 <월간중앙>에서 인터뷰할 때 있었던 낡은 베이지색 응접세트가 더 낡은 모습으로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YS가 손님들을 맞으며 받은 명함을 넣어두는 의자 옆 낮은 서랍장은 헐어서 잘 열리지도 않았다.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성적을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평가할 것이 없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무식하고요. 일반 검사들과 싸우고, 말 함부로 하고, 거짓말까지 하구요. 밑의 사람 구속됐을 때(측근 비리 문제) 가만히 있지, 대통령이 왜 거짓말합니까? 난 정상적인 사람으로 안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할 때 전직들이 다 연단에서 만나는데 내가 악수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YS는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켰지만 3당통합을 거부한 이후 정적인 DJ의 정치 후계자의 길을 걸어온 노 대통령에게 서운함이 많은 것 같다. 이번 팔순 생일에 맞춰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들고 온 축하 난도 리본을 뗀 채 한 구석에 놔두었다고 할 정도다.

-여러 정치인을 겪으면서 한국에는 어떤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정치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첫째가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봐요. 둘째로는 동시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무서운 신념을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도 배드민턴을 치십니까?
“추워서 좀 쉬고 있지만 날 풀리면 다시 시작하려구요. 매일 한 게임 정도 합니다.”

-상대는 누구인가요?
“동네 사람들이에요. 서로 치겠다고 합니다.”(웃음)

-상당히 건강해 보이시는데, 특별한 관리 비법이라도 있으신지?
“걸어서 배드민턴장까지 왕복하며 50분 걷는데 운동이 됩니다. 배드민턴 한 게임 치면 전신에 땀이 날 정도가 되구요. 식사는 가능한 한 소식을 하는 편입니다.”

이런 일상과 함께 보기 싫은 것은 외면하고,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는 YS 스타일도 건강의 비결일 듯싶었다.

-그간 하루 일과는 주로 어떻게 보냈습니까?
“늘 일이 있어서 바쁘게 보내왔어요.”

그는 역대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자서전을 활발하게 출간했다. 2000년 출간한 <김영삼 회고록 1·2·3>(백산서당 간)에는 정계에 입문해 대통령이 되기까지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담았고, 이번 팔순에 맞춰 내놓은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하>(조선일보사 간)에는 그 후 대통령 재임기간의 비화를 담았다.

또 자서전과 함께 CD롬으로 제작해 배포한 <대도무문>이라는 타이틀의 민주화투쟁사 영상물은 김기수 상도동 비서실장의 말에 따르면 “대통령께서 직접 제작 감독하셨다”니 바쁘게 살아왔다는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인터뷰 제2장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아, 이 사람이 간단치가 않아”

이 당선인과 YS의 우호적 관계는 한국 헌정사에서 처음 보는 대통령 당선인과 전직 대통령의 관계다. 1987년 6·29선언을 만들어 정권을 물려준 전두환 전 대통령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예우를 받은 적이 없다.

YS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현대그룹을 떠난 이 당선인을 전국구로 영입한 당사자다. 그렇지만 그가 1995년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그다지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어떻게 대통령 감으로 여기고 총력 지원하게 됐는지, 그 사연이 궁금했다.

-이 당선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였나요?
“내가 1992년 14대 총선에서 전국구로 발탁했습니다. 그때 현대그룹에서 아주 잘하고 있을 때여서 인상깊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아, 이 사람이 간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당선인의 자서전을 보면 “1998년 서울시장 출마를 놓고 김 전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총선 직후 내가 청남대에서 쉬고 있는데 (이 당선인이) 찾아왔어요. 왜 왔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서울시장 나가고 싶다고 공천해 달라고 해서, 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대통령직인수위원장직을 맡았던 정원식 씨에게 이미 선약을 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때 받은 내 느낌이 간단히 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업가이지만 고학도 하고 어려움을 겪은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이후에도 자주 만났습니까?
“시장 재직 때 부부끼리 식사도 한 적이 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에 도전하리란 생각을 안 했어요.”

-청계천에 가보셨나요?
“준공하기 전에 이 시장 부부 초청으로 두 부부가 함께 저녁 먹고 돌아봤습니다. 참 잘했더군요.”

-그러다 언제부터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이 당선인이 서울시장에서 물러나 대권 도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던 2006년 6월께 출마한다고 집으로 인사하러 왔어요. 그때 함께 온 이상득·이재오·이군현·정두언 의원 4명이 그쪽 사람의 전부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대표를 지낸 박근혜 씨 쪽이었어요.

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게 신념이에요. 그래서 이 후보를 돕기로 결심하고 경선 때부터 수시로 전화해서 격려했어요. 그때 둘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렵게 대통령 후보가 된 싸움을 해본 생각이 나더군요. 이 사람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대선을 YS와 DJ의 대리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선 과정에서 DJ의 훈수정치가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대선 막바지에는 이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만.
“김대중 씨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5년 재임기간 북한과 접촉하면서 그쪽을 잘 아는데, 북한을 이용해서 정치하는 거 이제는 안 됩니다. 북한사람 중에서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리 하는 사람 있는데, 김대중 씨도 마찬가지고요, 이젠 안 됩니다.”

-대선에 임박해 ‘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신(新)북풍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는데요.
“그것을 양쪽에서 이용하려고 했다고 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불러들이고, 노무현 씨는 얼씨구 하고 갔던 게지요.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습니다.”

-DJ가 왜 그렇게 나섰다고 보십니까?
“정권이 바뀌면 두려운 것이 있다고 봅니다. 대선기간 중 미국을 급히 다녀온 것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당선인이 “김 전 대통령께서 고비마다 많은 격려를 해줬다”고 공개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는데, 최대 고비는 언제였습니까?
“경선 당시 박근혜 씨가 심하게 공격했을 때와 김경준의 귀국으로 BBK 검찰수사가 시작됐을 때였습니다. 그때가 힘든 과정이었어요. 사람들의 70~80%는 나서지 말라고 만류하기까지 했어요.”

-그래도 흔들림 없이 이 당선인을 믿었습니까?
“그런 건 나한테 변명하거나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BBK 사건은 김경준이 한 말이 거짓말인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나요?”

-김경준 씨를 보고 오히려 이 당선인을 믿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노 대통령이 대선을 불과 3일 앞두고 BBK 재수사를 지시하고, BBK특검법도 수용했습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내린 김대중 후보 비자금 수사 유보 결정과는 사뭇 대조적인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선거 방해 공작이었다고 봅니다. 국가라는 게 안중에 없다고 봤습니다. 나는 김대중 비자금을 수사하면 호남에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 판단했어요. 대선을 못 치른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사 결과를 갖고서도 덮었습니다.”

-개표방송이 시작되고 이명박 우세가 예상될 때 심정이 어떠하셨나요?
“나는 이미 압도적으로 이긴다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런 확신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정권이라, 그게 너무 강해서 웬만한 것으로는 먹히지 않게 돼 있었어요.”

- 18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한나라당 내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내 불협화음이 새 정권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조짐입니다.
“뭐 좀 싸우는 게 더 관심을 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으로 김대중에게 1차에서 이기고 2차에 졌을 때 한 번도 무엇을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도 후보 경선에서 진 사람이 뭐 내놓으라 그럽니까? 진 사람은 깨끗하게 물러나는 게 도리라고 봅니다.”

-뜨거운 감자가 돼 있는 ‘한반도대운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거기간 중 이 당선인이 이 문제에 대한 집념이 굉장히 강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절대 국민 지지가 없으니까 무리하게 추진하지 말라고 했어요. 표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어요. 결국 어제(1월14일) 기자회견 보니까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을 것 같던데요. 이런 일에는 첫째, 국민 지지가 있어야 하고 또 일이 간단치 않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가 추진한 지난 10년간 대북정책의 골자는 햇볕정책이었습니다. 이 당선인의 대북정책은 어떤 기조 위에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두 사람은 북한에 대해 일방적인 퍼주기와 미화시키기를 해 국민의 대북관을 오도하는 큰 죄를 지었다고 봅니다. 북한을 그렇게 위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일은 대북관계와 대미관계입니다.

“박근혜 씨 너무 심하게 말해 MB 좋겠나?”

그래서 이명박 당선인에게 나도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볼 때는 대미 동맹관계를 강화하면서 그 두 사람과 전혀 다른 대북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봅니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하는 것 보니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일본과의 관계도 잘될 수 있다고 봅니다.”

-회고록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 가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 당선인이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국민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을 잘 섬기겠다고 하는 건 방향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이 당선인에 대한 지지가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시나요?
“보수화된 것은 맞는다고 봅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실 보수냐 진보냐를 구분하는 것은 좋은 시각은 아니라고 봅니다. 진보는 그간 비생산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야 한다고 봅니다.”

■ 인터뷰 제3막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내가 한 일은 개혁이 아닌 혁명이었다”

YS와 그의 곁에서 오랜 정치역정을 함께해온 민주동지회의 꿈은 ‘문민정부 재평가’다. 모든 정권에는 공과 과가 있는데, 어렵게 완수한 성과까지 매도되는 데 대해 지난 10년간 울분을 삭인 것 같다.

팔순을 기념해 내놓은 회고록과 민주화투쟁 기록 영상물은 이런 재평가 작업의 첫 발자국일 성싶다. 문민정부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신념이 강한 만큼 이것이 이명박 정부에 어떤 숙제가 될지 궁금해진다.

-오랜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32년 만에 문민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취임 초기부터 컸을 것 같습니다. 회고록 전문에 “모두가 개혁을 원했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웠다”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나요?
“개혁을 하니까 처음에는 박수를 치던 사람들이 자기 문제가 되니까 반대하더군요.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한 것은 결과적으로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실시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회 척결을 안 했으면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은 대통령이 안 됐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파키스탄·태국·미얀마와 같은 악순환이 반복됐을 겁니다.”

-그만큼 군 조직이 강했다는 말인가요? 육사 핵심 인사의 모임인 하나회 척결은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데, 어떻게 결심하고 시행하셨습니까?
“전두환 시절 군이 얼마나 힘이 셌던지 국회의원들 수없이 맞았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민정당 총무인 이세기 의원, 신민당 총무인 김동영 의원을 비롯한 여·야 국회 국방위원 20명을 초대해 저녁 회식을 하면서 전부 때렸어요.

총무가 1차적으로 맞고, 안 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맞고도 자신이 맞았다는 말을 절대 못했습니다. 겨우 신문에 쓴 것이 국방위 회식사건 정도로 나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적인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하나회가 셌어요.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를 칠 생각으로 명단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리 임명하고 내각 임명 끝난 직후 국방장관을 불러서 하나회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고 하니까 두려워하더군요.

국방장관 임명한 그날 참모총장과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의 목을 쳤습니다. 모든 국민이 쿠데타 날까 두려워했는데, 동시에 후임자 임명하니까 하나하나 주요 간부 다 정리됐어요. 그렇게 대담하게 안 했으면 못했어요. 준장 이상은 내가 별을 달아주는데, 그때 하도 많이 잘라서 별이 없어서 새 사람 임명하는 데 애를 먹었을 정도였어요.”

- 쿠데타로 이어질까 염려하지는 않으셨나요?
“내 인기(지지율)가 그때 90%에 육박할 정도라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결정 내린 것입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목이 나갔어요(배석한 김기수 실장이 “퇴임 후 대통령께서 외롭게 싸울 때 장태완 향군회장 등 군 인사들은 한 명도 안 나타나더라”고 말했다).

특히 수경사령관은 11만 군인을 거느려 혼자서 쿠데타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전두환·노태우 시절에는 한 달에 최소한 두 번 정도는 청와대 안가에 불러 잘 먹였다고 해요. 그러니 나라가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면 니들은 죽었다, 벼르고 있었지요.”

-금융실명제는 어떤 점에서 힘들었나요?
“금융실명제는 내 선거 공약이었는데,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아주 안 좋을 때 시행됐어요. 내부적으로 금융실명제는 경제 상황이 좋을 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었지만 보안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비밀이 새나가면 돈이 전부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엉망이었을 것입니다.

박관용 비서실장과 박재윤 경제수석도 모르게 준비를 지시한 것은 딱 두 사람이었어요. 홍재형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재무장관을 불러 만일 비밀 못 지키면 두 사람 다 모가지라며 지시했어요. 그 사람들 그거 하는
6개월간 죽었어요.

일본도 못하고, 과거 정권도 약속하고 못했던 일이었어요. 근데 언론이 참 무책임하더군요. 금융실명제 실시하기 전에는 언론 사설에서 내가 금융실명제 하나만 하면 위대한 대통령이라더니, 막상 하고 나니 비판적이 되더라구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서실장은 섭섭했겠네요.
“안 그랬어요. 정치인들은 알면 못 참는 기질이 있어요. 내가 1991년에 소련에 갔을 때 비밀리에 북한의 허담 서기와 만났거든요. 이 일을 한국에 돌아와서 발표하려고 수행한 국회의원 16명에게, 허담을 만났는데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수행기자들에게 조금씩 흘러서 결국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기사화됐어요. 당시 이인제 대변인이 기자들이 그 사실을 다 알고 연합통신이 한국에 벌써 치고 왔다고 해서 워싱턴 도착하자마자 수행기자 오라고 해서 다 공개해 버렸어요. 이튿날 내외신 기자까지 다시 모여서 대 회견을 했지요. 그래서 박관용 비서실장에게도 말하지 않은 겁니다.”

-재임 중이던 1992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됐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북한 김일성이 먼저 날 만나자고 제의하고 죽었는데, 그것도 운명 같아요. 그때 그쪽에서 만나자고 했으니까 성사만 됐으면 상당히 양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한국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에요.
김대중 씨가 5억 달러 갔다 주면서 만나달라고 구걸하고, 되지도 않을 4월 답방 이야기하고, 참….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청와대에서 둘이 점심 먹을 때 내가 ‘거짓말 그만해라, 김정일은 절대 못 온다’고 했어요. 신문에는 다 온다고 썼던 때였어요. 북한을 어떻게 믿나요?”

-회고록을 보면 1997년 대선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연기하도록 지시했는데, 당시 계좌까지 다 파악된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받은 20억 원 이상의 정치자금까지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도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김대중 씨 미운 생각만 하면 그렇게 (수사 연기) 못했을 것이지만 호남의 반발로 대선을 못 치르게 되면 벌어질 국가 위기를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했던 겁니다.”

-이 조치에 대해 수차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지 않았나요?
“당선되고 이틀 후 전화 와서 어제 미국 대사가 찾아와서 ‘당신이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김영삼 대통령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하더라구요. 퇴임 직전에 청와대에서 부부끼리 식사하는 데 또 그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정신 차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취임 직후부터 1년6개월간 내 뒷조사를 하더라구요. 내가 살던 상도동 101평 집 한 평도 안 늘리고 돌아왔는데 말이에요. 더군다나 국회 청문회에 나를 부른다는 건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나를 모욕주기 위해 그런 것이라서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정부가 출범한 직후 시작된 경제 청문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실시된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칼날이 가해졌다. 차남 김현철 씨를 비롯해 많은 전직 관리와 정치인이 증인으로 불려나갔고, YS 역시 국회 IMF 환란조사특위의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일이 그에게는 가슴속 응어리가 돼 있었다.

-DJ 비자금 내역을 공개하실 겁니까?
“이번 정권에서 실시한 공적자금 수사 결과만 갖고도 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그 입으로 ‘국민에게 약속을 못 지킨 적은 있으나 거짓말은 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배석했던 김기수 비서실장은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뒷받침하듯 “사라진 공적자금 69조 원의 행방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너무 성급하게 가입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 판단으로는 우리가 세계화에 동승할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나요?
“그때 우리 내부에서도 빠르지 않냐는 반대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개인이나 국가가 위를 보고 걸어가야 발전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회고록을 보면 2002년 월드컵 유치도 실제로는 김 전 대통령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월드컵 유치는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일본이 먼저 유치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내가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위원들을 이런저런 기회마다 초대해서 만났어요.

한·일 공동 개최로 결정이 난 데는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벨란제 FIFA 회장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큰 역할을 했지요. 사마란치가 FIFA 본부까지 찾아갔어요.

여기에 이르기까지 진짜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월드컵유치위원장을 맡은 구평회 대한무역협회 회장이었어요. 1993년 FIFA에 유치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하면서 서울대 동기생인 구 회장에게 모든 것을 맡겼어요.

“외환위기 60%는 DJ 책임”

당시 럭키금성상사(LG상사의 전신) 회장이었던 구 회장이 60억 원을 먼저 냈고, 현대·삼성도 자신들이 낸 것만큼 내라고 했어요. 그렇게 기금을 만들어서 썼어요. 그때 김운용 IOC 위원, FIFA 부회장으로 집행위원이던 정몽준 의원, 이홍구 월드컵 추진위 명예위원장까지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역사에 IMF 구제금융을 받은 대통령으로 남는 일은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회고록에도 “나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 지금도 고통 속에서 반추하고 있으며, 국민 여러분께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히셨는데….
“그건 나한테 물론 책임이 있지만, 60% 이상은 김대중 씨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노동법이나 금융개혁법·한은법을 원안대로 시일 내에 통과시켰어야 했는데, 협조해주지 않았어요.

또 중요한 것은 기아자동차 처리 문제입니다. 이 일은 완전히 외국 투자자들이 우리나라에서 돈을 철수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문제 기업을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본 것이에요. 김대중 씨가 나서서 국민기업이니 지켜야 한다고 찾아가고 그랬잖아요.

내가 당시 김선홍 기아자동차 회장을 구속시키지 못했던 것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호남 출신 기업인을 구속하면 문제될까 우려해서였어요. 그랬더니 자신이 대통령 되고 나서 바로 구속하더군요.”

이에 김 비서실장은 “우리나라 가정경제가 파탄난 건 국민의정부에서 시행한 신용카드 남발 때문이지 IMF 때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재임기간 중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재판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한국정치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성공한 쿠데타도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전례를 남긴 것 외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전례도 된다는 점은 고려하셨는지?
“바로 그 점 때문에 내부에서 반대도 했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았어요. 최소한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며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고,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거둬서 갖고 있는 도둑인데, 아무리 대통령 했다고 해도 반드시 본때를 보여야 다시는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1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야당 18년 하면서 딱 한 번 영수회담 할 때 청와대에 간 적이 있는데, 육영수 씨가 총탄에 세상을 떴을 때예요. 둘이 관저 밖을 내다보면서 커피를 마셨지요. 박정희 씨가 창밖에 새가 한 마리 와서 앉는 걸 보고는 자기 신세가 저 새와 똑같다고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에, 어떻게 마음이 안 됐는지 위로를 해줬더니 손수건 꺼내서 눈물 닦더라구요.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날 모처럼 준비해온 말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왔어요. 그러나 지나고 나서 정치행위들을 보니 영 딴판이더라구요.”

-인생 80년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과 후회하는 일을 각각 두 가지만 꼽는다면….
“크게 후회하는 일은 없어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어요. 늘 탄압받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참모들이 그 말이 끔찍하다고 하지 말라지만 내 심정이 늘 그랬어요.”

인터뷰 중에 YS는 가끔 골똘하게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마다 “이 당선인 취임식에서 노무현과 만나 악수를 해야 하나”라고 했다. 한마디로 손도 잡기 싫은 모양이다. 지난 10년간 두 대통령에게 맺힌 한의 골이 꽤나 깊어 보인다. 문민정부 재평가와 민주계의 부활은 이 당선인에게 만만찮은 숙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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