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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넘게 배뱅이 인생 … 아직도 무대 서면 떨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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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관 선생<中>은 매년 제자들과 창작극 발표회를 연다. 그는 여전히 무대에선 떨린다고 했다.

“우리 집안에 소리하는 사람은 (나 말고) 없어”라고 말하는 이은관 선생. 그는 증손자들에게는 양악을 권했다고 말했다. [사진=최승식 기자]

 “산 높고 골 깊으니 여기가 청산마루로구나~.”

 백수를 바라보는 소리쟁이는 아버지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원도 이천(伊川) 산골 마을의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오를 때면 늘 소리를 뽑았다. “아버지 노래가 지금도 귀에 남아….” 족히 80년은 흘렀을 텐데, 아들은 어려서 듣던 소리를 목청껏 끌어올렸다.

 소리꾼 집안도 아니요, 어깨너머로 배울 스승도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목청만은 번듯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준 아버지 덕에 이은관(92)은 어려서부터 노래 잘한다며 귀여움을 받았고, 75년을 무대에서 노래했다.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더 많겠다. 그러나 “왔구나~왔어~ 배뱅이가 왔구나아~”하면 ‘옳다구나’하고 무릎을 칠 게다. 배뱅잇굿 하면 이은관이오, 이은관 하면 배뱅잇굿이었기 때문이다. 16일 명창 이은관 선생을 만났다. 그는 26일 ‘원각사 100년 광대 100년 정동 명인뎐’에서 배뱅잇굿 공연을 한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명창 이은관을 만난 청계천의 배뱅잇굿 보존회 사무실은 가파른 계단 위 3층에 있었다. 민요 학원 간판을 함께 단 보존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노인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아흔둘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사무실 안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장구가 늘어선 반대편에는 뜻밖에도 전자 키보드와 색소폰이 눈에 띄었다.

 “내가 유랑극단을 했잖아요. 그때는 양악도 나오고, 국악도 나오고 ‘한·양 합주’를 했지요. 양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때 색소폰을 배웠는데, 분장실에서 혼자 연습하고 그랬어요. 피아노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어려워요. 근데 이건(전자 키보드) 쉬운 거 같아요.”

 연주를 청했다. 3층을 오르내리는 데 아직 문제없다는 건강 노인이지만 어지간한 힘으로 불어선 ‘삑’ 소리도 안 난다는 색소폰 연주를 어찌 하는지 궁금했다.

 “허허, 이건 소프라노 색소폰이라 작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가져올걸. 크고 더 멋있는 게 있는데.”

 얼굴이 살짝 빨개지도록 부는 색소폰의 울림은 신기하게도 그의 목청처럼 구성졌다.

 풍채 좋고, 소리 좋고, 색소폰도 부니 젊은 시절 인기가 대단했겠다. “허허허.” 소리하듯 우렁찬 웃음부터 터지더니 “지금 얘기하면 믿지도 않을 거예요. 얘기하면 과장될 수도 있고.” 좋았던 옛 시절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말이 끊어진다. 쫓아다니는 여성 팬은 없었나 짓궂게 물었더니 연방 웃는다. “허허, 그거 말해서 뭐 하나. 그런데 그땐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인기가 많았구나 싶은 거지.”

 모두 다 지난 얘기인 듯 웃고 말지만, 인터뷰 전 사진 촬영 준비를 하던 모습에서 역시나 스타 기질이 배어났다. 사진 배경을 정돈하고 싶다, 했더니 키보드를 직접 번쩍 들어 옮겼다. 그러고는 거울 앞에 한참을 서서 한복을 고쳐 입고 나서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옛날엔 유성기 있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내가 소리를 좋아하니까 아버지가 사줬거든. 그런데 열여덟인가 철원극장에서 경성방송국이 ‘전국신인남녀콩쿨’을 열었어요. 거기서 내가 1등을 했어. 그냥 노래하는 콩쿠르였는데 ‘사설난봉가’를 불렀어요. ‘놀아난다~놀아난다~산골 큰 애기가 놀아난다~.’ 1등을 하면 레코드를 내는데, 난 우리 소리를 해서 못 냈어요. 일제시대였으니까.”

 그의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옛날 얘기 해주듯 흥을 탔고, 추임새인 양 틈틈이 노래까지 흘러나왔다. “돈 많은 집에서 났으면 성악을 했을 거예요.” 사실 남자 목소리로는 상당히 고음이라 테너 가수가 됐을 수도 있겠다.

 “집안에서 매를 들고 그러진 않았지만, 그래도 소리한다고 하면 안 좋아해요. 그래서 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쳐 나왔어요. 서울서 소리 공부 하면서 돈이 떨어지면 편지를 보냈지. 그럼 돈 보내 주시고 그랬어요. 나중에 이북에서 식구들이 다 내려와서 같이 살았는데, 그때는 살기가 어려워서 잘 못했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잘해드릴 텐데… 생각해요.”
 아버지 속 썩인 일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나 보다. 그래도 일흔셋을 사시면서, 음반 내고 방송하던 아들의 전성기는 다 보고 가셨단다.

 “내가 그때(1970년대) TBC(동양방송)에서 매일 혼자 방송을 했어요. ‘후라이보이(고 곽규석씨)’가 KBS에선가 하고, 송해씨도 매일 했어요. 매일 하는 건 인기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내가 일본을 가야겠는 거야. 지금은 쉽게 왔다갔다 하지만, 그땐 안 그래요. 정말 인기 스타만 가는 건데, 방송국에서 녹음을 하고 가래. 그래서 내가 반년치를 녹음하고 갔어요.”

 일본에 교포 공연을 가면 공연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극장엔 이은관 얼굴 좀 보자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덕에 은행에 쌓아두고 그런 거는 아니지만,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다른 국악인들에 비해서 큰 고생 없이 지냈단다. 하지만 후라이보이처럼 방송에 나오는 국악인을 곱게 보지 않았다.

 “전통 소리 아니라고 말들 많았어요. 장소팔·고춘자씨랑 같이 하고, 창극도 해서 그런지 내가 딴 사람들보다 10년이나 늦게 문화재를 받았어요. 내가 문화재 된 다음 해에도 MBC ‘스타의 밤’에 나가서 김정구씨랑 ‘두만강~’을 불렀는데 그때도 걱정했어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나중에도 텔레비전 나가서 나팔 불고 그랬는데도 아무 말을 안 해요. 아무튼 후회는 안 해요, 잘했다고 생각하지.”

 남들 가는 길에서 살짝 빗껴난 건 이뿐이 아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 폭포수 앞에서 피를 토해야 득음하는 줄 알았더니, 이 선생은 꼭 그렇지도 않단다.

 “예전에 목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님이 쉬라고 그래. 그럼 쉬어야지. 옛날 소리 선생님들은 목소리 안 나와도 자꾸 소리를 질러야 한다, 폭포수 앞에 가야 한다고 그러는데 난 그런 식으로 안 하고, 의사님 말 듣는 게 최고야.”

 이렇게 ‘의사님’ 말 잘 듣고, 늘 웃는 얼굴로 세상사 흘러가는 대로 지내다 보니 여전히 공연할 힘이 넘친단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자들은 ‘마지막 공연일지 모른다’고 수식을 붙였지만 선생은 70년 넘게 배뱅이로 살면서도 “아직도 무대에 서면 떨린다”는 영원한 현역이다.

 “소리가 안 나면 어쩌나, 제자보다 뒤지면 어쩌나….아직도 긴장하고 마음이 그래요. 요즘은 국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오지만 옛날엔 안 그랬어요. 20대부터 수백 명씩 보러 오는데 관객마다 다 달라요. 충청도 사람들은 양반이라,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스윽 나가요. 그러니까 웃기다가 울리다가 관객들 비위 다 맞춰 줘야 하니까 그게 어려워요. 그래도 무대에 딱 올라서 ‘왔구나~ 이은관의 배뱅이가 왔구나~’하면 다들 박수 치고 좋아해.”

 1시간 넘게 달변이 쏟아졌다. 이렇다 보니 처음 준비했던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소리를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쑥 들어갔다. 대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요즘엔 디비디? 맞나? DVD가 좋다고 해서 그 작업도 하고 있고, 책(악보)도 쉽게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악보 안 보니까 얇은 책에 가사만 있는 게 좋아요. 그리고 많이 안 알려졌지만 창작도 계속해야지. 제자들이랑 창작극도 할 거예요. 올해 이거 한다고 내가 80%는 장담해요.”

 인터뷰를 마친 뒤 들고 간 ‘배뱅이굿’ CD를 선생에게 내밀었다. 사인해 달라고 하자 “이거 이젠 안 파는 걸 텐데…. 요즘은 국립국악원 같은 데 가야 있어요”라며 반가운 눈치다. 공들여 이름 석 자를 크게 써 준 CD를 받아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그는 왕년의 스타다운 당부를 덧붙였다. “멋있게 편집해 줘요.”

글=홍주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배뱅잇굿=줄거리가 있는 ‘연극적 굿놀이’의 하나로 평안도·황해도에서 전승됐다. 내용은 이렇다. 황해도에 사는 김·이·최 세 정승이 백일기도로 딸 하나씩을 얻었는데 최 정승의 딸이 ‘배뱅이’다. 배뱅이는 시주하러 온 상좌승과 사랑에 빠졌으나, 떠나버린 중이 돌아오지 않자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정승이 딸의 넋이나마 불러 보자고 재산의 절반을 내걸자 평양의 건달이 박수무당 행세를 하며 넋이 찾아온 것처럼 꾸며 돈을 차지한다는 해학적인 내용이다. 배뱅이 혼이 찾아온 것처럼 꾸미는 순간에 나오는 “왔구나~ 배뱅이가 왔구나~”하는 소리가 클라이맥스다.

낭월 이은관 선생은

1917년 휴전선 이북 지역인 강원도 이천에서 난 이은관 선생은 유성기판 태엽을 감아 가며 혼자 소리를 시작했다. 열여덟에 경성방송국의 ‘전국신인남녀콩쿨’에서 1등을 한 뒤, 황해도 황주 권번에서 소리를 가르치던 명창 이인수 선생에게서 서도소리와 배뱅잇굿을 배웠다. 그는 “그땐 매스컴을 못 타서 우리 선생님이 덜 유명했지만, 지금껏 선생님처럼 소리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스승을 한껏 치켜세웠다. 60년대 장소팔·고춘자씨 등과 유랑극단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TV 출연과 해외공연을 하며 70년대 전성기를 보냈다. 장안에 이은관의 배뱅잇굿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악인으로는 흔치 않게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84년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이른바 ‘인간문화재’가 됐다. 선생은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보존회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매년 창작극 발표회를 여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