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 탠디 사장이 서울 봉천동 매장에서 여성 수제화를 들어보이고 있다.
◆핸드백 장인의 꿈=정 사장은 원래 수제 핸드백 장인이었다. 열여덟 살에 전북 정읍에서 상경해 취직한 곳이 서울 명동의 한 핸드백 가게. 오전 8시 출근해 오후 11시까지 가죽을 두드리고, 자르고, 꿰매는 작업을 반복했다. 13년간 일하며 가게 장인 중 최고 기술자인 ‘대장’이 됐고, 직접 가죽 색깔과 가방 모양을 정하는 디자이너 역할도 겸했다. 핸드백 장인으로 잘나가던 그 당시, 그의 꿈은 엉뚱하게도 구두가게를 차리는 것이었다. “구두가게 세일이 시작되면 명동에 손님 줄이 1㎞는 늘어서 있곤 했죠. 가방은 한번 사면 5~6년은 기본으로 쓰지만, 구두는 1년에 최소 한두 켤레는 장만해야 하잖아요.”
1976년 독립해 가방공장을 차렸지만 2년 만에 화재로 전 재산을 날렸다. 지인들에게서 자금을 빌려 봉천7동 20평짜리 집에서 다시 가방공장을 차린 것이 79년. 공장은 82년 교복 자율화 정책을 맞아 날개를 달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85년 명동에 탠디라는 브랜드를 걸고 수제화 가게를 냈다. 10년 이상 품어 온 꿈을 이룬 것이다. 명동 매장에 이어 이듬해 이화여대 앞, 또 3년 뒤 뉴코아백화점(서울 잠원동)에 매장을 내며 세를 넓혀 나갔다. 지금 전국 탠디 매장은 70곳에 육박한다.
본사 직원 140명 중 디자이너가 20명이나 되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중견기업이지만 디자이너에 한해선 대기업 못지 않게 해외출장을 자주 보낸다. 2년 전까진 이탈리아 밀라노에 직원 한 명을 5년 동안 상주시키며 최신 유행을 익히게 했다. 지금도 디자이너들이 조를 짜 1년에 예닐곱 번씩 해외 트렌드 견학을 떠난다. 탠디가 계절마다 내놓는 샘플 구두는 모두 200여 가지. 정 사장은 “디자인 하나하나를 직접 체크한 뒤 내놓는다”며 “아직 20대 여성 취향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의 집무실 곳곳엔 해외 패션잡지가 쌓여 있었다.
◆무차입 경영, 무상 AS로 탄탄한 기반=외환위기의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2000년. 탠디는 봉천11동에 본사를 열었다. 그리고 본사 입주 시기에 맞춰 일간지 광고를 냈다. “구두를 평생 무료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
외환위기는 탠디엔 기회였다. 평소 ‘빚을 내 확장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킨 덕에 탠디는 자금 압박이 없었다. 다른 수제화 브랜드들이 사업 규모를 축소하던 98년 탠디는 오히려 매장 15개를 더 열 수 있었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6~7개월은 매출이 주춤했지만, 이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한다.“ 피혁 수입가가 치솟아도 원재료 수준을 낮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자 고객들이 믿어준 것 같다”고 정 사장은 돌아본다. 이 여세를 몰아 무료 AS를 시작한 것이다. “물건을 살 때보다 수선받을 때 고객을 만족시켜야 진짜 단골이 되거든요. 신발은 또 수선할 일이 얼마나 잦습니까.” 대신 세일은 가급적 줄여 가격에 대한 믿음을 심기로 했다.
그의 꿈은 수제화 업계를 탠디와 프리미엄 브랜드 ‘베카치노’, 그리고 미셸로 평정하는 것. 지난해 고급 수제화 브랜드 베카치노를 내며 탠디·베카치노를 합쳐 11개나 매장을 추가로 열었다. 베카치노 출범에만 30억원을 쏟아부으며 영업이익은 뚝 떨어졌지만, “최고의 수제화 회사로 올라서기 위한 투자”라고 자신했다. 정 사장은 최근 탠디 매장에서 그의 ‘본업’인 핸드백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임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