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내 생을 부자로 마감하기 싫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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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30면

부자가 죽고 나서 가진 재산을 후손이나 재단에 넘겨 대물림하는 게 이젠 옛말이 되고 있다. 돈 모으는 재테크 못지않게 모은 재산을 살아생전에 잘 나눠주는 ‘나눔의 기술’이 부자의 덕목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미국의 자선관계 전문지 크로니클 오브 필랜스로피 보도에 따르면 2007년도 미국의 거액 자선자 가운데 1위에서 10위까지 톱10 전원이 살아 있는 기부자로 드러났다. 톱10 전원이 생전 기부자인 경우는 거액 기부자 랭킹을 조사·발표한 200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게다가 미국 경제 상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1억 달러 이상 기부자가 20명에 달했다. 큰 부자들의 기부 인심이 갈수록 후해지고 있어 전체 경제 상황과는 관계없이 2008년 기부 전망도 밝다는 낭보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일찍이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라는 명언을 남겼다. 생전에 재산을 움켜쥐고 구두쇠 노릇을 하다 죽고 난 뒤 엄청난 재산을 남기는 부자들을 빗댄 말이다. 사상 최대인 435억 달러를 기부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살아 있을 때 돈 쓰는 일에 현명해지라”고 주문한다. 이들에게 영향받은 때문인지 기부는 자선이 아닌 사회 투자라는 인식이 날로 확산되고 크고 작은 부자들이 ‘생전 기부 경쟁’ 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초고액 기부자의 나라다. 연간 기부총액이 국내총생산(GDP)의 1.7%에 달한다는 추계도 있다. 미국인들이 거액 기부를 즐겨 하는 데는 미국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가 미국 자본주의의 냉혹성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富)와 극심한 불평등을 동시에 창출한다. 따라서 승자들은 그들의 재산 일부를 가난한 패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불문율처럼 깔려 있다. 19세기 자본가 카네기와 록펠러가 이런 인식을 주도했다. 버핏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시장체제는 가난한 사람 위주로 작동되지 않는다”며 상속받아 대대로 부를 누리는 부자들을 ‘운 좋은 정자(精子)클럽 회원들’이라고 비웃는다.

둘째, 20세기 말 이후 자산가격 상승과 세계화, 정보기술 및 금융혁신 붐을 타고 세계적 갑부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다. 이들 신흥 부자 그룹 사이에선 자신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세상에 대해 뭔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번지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부자는 무슨 산업의 거물(tycoon)들로 호화 요트 크기와 길이로 그 위세가 가름됐었다. 세계화·정보화 시대 부자들은 ‘하이테크 억만장자(tech billionaires)’다. 이들은 재산을 그냥 쾌척하는 통상적인 자선가와 달리 자선 프로젝트에 투자해 더 큰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주려는 ‘전략적 자선가’다.

기부 자선사업의 대상도 세계화하면서 기부 자선의 양과 질이 모두 달라지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단기간에 떼돈을 번 부자들이 너무 많고 이들일수록 엄청난 거액을 쾌히 던진다. 또 미국 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아프리카의 물 부족과 질병 퇴치, 유엔을 통한 재난 구호 등 글로벌 자선 프로젝트에 눈을 돌리고 있다. 뒤에서 돈만 대는 후원자에서 벤처 자선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자선의 질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부사업(giving business) 또한 고도의 전문화 시대다. 관리 부실로 설립자가 죽은 뒤 초심을 잃고 유명무실해지는 자선재단들보다 훌륭한 자선재단을 골라 생전에 쾌척함이 나눔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버핏과 빌 게이츠의 ‘B’를 상징하는 ‘빌랜스로피(Billanthropy)’는 곧 이 시대 ‘기부의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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