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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배 들었을 땐 죽는다는 각오 해야겠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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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06면

신동연 기자

손 대표는 이날 인터뷰에서 “자연은 한 번 파괴되면 복구가 안 된다” “대통령 권한이 집중되는 건 분권화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통일부·정보통신부·여성가족부의 폐지와 인권위 위상 변화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등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날을 세우는 모습이었다.

‘백척간두’에 다시 선 손학규 통합신당 대표

그러나 자신과 통합신당의 문제를 꺼내자 다시 ‘백척간두진일보’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손 대표가 이 말을 처음 한 것은 지난해 3월 14일 봉은사 법회에서다. 그는 “결정이 어려우면 더 어려운 길을 택하겠다”며 화두를 꺼냈다. “백척간두진일보란 무슨 뜻일지…”라고 여운을 남긴 다음 날 손 대표는 조용히 사라져 강원도 양양 낙산사를 찾았다. 그리고 나흘 뒤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당시 한나라당 ‘빅3’ 중 하나였던 그의 상황은 어려웠다.

경선 예비주자로 나선 그는 정문헌 의원을 내세워 경선룰 협상에 참여했지만 설 자리가 없었다. 지지율이 3% 안팎인 데다 당내 기반이 취약해 당시 경선 규칙이던 2(대의원):3(당원):3(일반 국민):2(여론조사) 중 어느 것 하나 기댈 만하지 못했다. “줄세우기가 심각하다”는 그의 비판은 허공에 울렸다.

두 번째는 9월 29일 통합신당의 광주·전남 경선 결과 발표 직후였다. 이때도 처지는 비슷했다. 같은 달 15~16일에 벌어진 제주·울산·강원·충북 지역 투표에서 패배한 뒤 “구태의연한 조직 동원 선거가 판친다”며 다시 자택 칩거에 들어갔다. 이틀 만에 돌아온 그는 “나부터 (조직 선거의) 유혹에서 벗어나겠다”며 선대본과 캠프 사무실 해체라는 깜짝 선언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복귀해 치른 호남 경선에서 그는 정동영 후보에게 다시 10%포인트 가까운 차이로 졌다. 그는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백척간두진일보하는 자세로 뚜벅뚜벅 나가겠다”고 했다.

이후 룰 문제로 공전되던 경선판으로 돌아왔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10월 9일 경선 복귀 기자회견에서 손 대표는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풀 한 포기 잡으려 발버둥친들 무엇하겠느냐는 마음”이라며 “지더라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대선 승리를 위해 수행원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백척간두”라고 할 때마다 나름의 비장감을 보였지만 그의 결단을 납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지자들에게 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우호적이던 한나라당 의원들 중 탈당에 동참한 사람은 없었다. 최측근이었던 박종희·신현태 전 의원, 김성식 전 경기도부지사도 손을 놓았다.

선대본 조직 해체는 스스로 죽는 길이 분명했지만 정치적 ‘쇼’라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 역시 측근들의 조언과는 다른 길이었다. 손 대표를 거들던 한 의원이 조직 선거에 맞대응하기 위해 버스 동원 전략을 제안하자 손 대표가 “나를 이렇게 모르느냐”며 화를 냈다는 일화가 회자되기도 했다.

지난 10일 우여곡절 끝에 교황식 선출방식으로 새로운 야당의 당수가 된 손 대표는 다시 백척간두에 섰다. 당수가 됐지만 친위부대가 없는 사령관 신세이기 때문이다.

15일 그는 최고위원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박홍수 전 농림부 장관, 박명광·유인태·홍재형 의원, 정균환·김상희 전 최고위원을 지명했다. 계파 안배를 통한 체제 안정에 무게를 실은 인선이라는 전반적인 평가가 나왔다. 쇄신을 촉구하는 일부 초선 의원과 당 대표로 우원식 의원을 밀었던 김근태계 쪽에선 “이게 ‘반성과 쇄신’이냐”는 반응이 표출됐다. 최대계파인 정동영계에서는 “최소한 인선 과정에서 상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들린다. 이해찬·유시민 의원은 이미 탈당을 선언했다.

손 대표는 “인선이 만족스럽지 못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며 “그러나 쇄신을 위해 안정을 취해 보자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탈당 의원들에 대해선 “함께 국민에게 신뢰받는 당을 만드는 게 제 바람”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나는 이념선상에 있는 진보가 아니라 생활 속에 있는 진보를 만들겠다”며 ‘노무현식 진보’와의 차별화를 강조했다.

선거 패배를 두고서는 “국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하는 오만한 자세가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손 대표의 이 같은 ‘반성과 쇄신’이 통합신당 리더로서 그의 자리를 확고하게 해줄까.

첫 번째 관문은 10% 안팎으로 떨어져 있는 정당 지지율을 얼마나 끌어올리느냐다. 정치컨설턴트 윤경주 폴컴 대표는 “이명박 정부가 공식 출범하고 한나라당 공천이 본격화되는 2월 말까지 당 지지율을 2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일단 성공”이라며 “당내 긴장감을 높이기보다 인수위가 쏟아내는 정책들에 대해 ‘합리적인 비판과 대안’으로 대결하는 모습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공천에서 각 계파의 견제를 뚫고 현역 의원 물갈이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느냐도 여기에 달렸다”고 봤다.

손 대표는 통합신당 의원들의 위기를 보여준 중앙SUNDAY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여야 불문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고 크기 때문에 현역 교체에 대한 요구가 클 것”이라면서도 “구체적 인물을 놓고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관건은 인적 쇄신이 가능한 공천기구 구성과 총선에 대한 자신의 거취다. 손 대표의 한 오랜 정신적 후원자는 “손 대표 직계 형성이나 계파 간 이해관계 조율에 매달린다면 살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며 “지금이야말로 자신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총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함께 패배가 확실시되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구에 출마해 ‘희생 제의’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과 20순위 밖의 비례대표 번호를 택해 정당 득표 마지노선을 긋고 뛰어야 한다는 의견 등이 분분하다. 일단 그는 “(총선 거취에 대해) 생각을 안 해봤다”고만 말했다.

손 대표 지인들의 기억을 엮은 책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에 등장하는 35인의 그에 대한 공통된 평가는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학생운동가-대학교수-국회의원-장관-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그는 그런 평가를 받아왔다. 경기도 파주 LCD 산업단지 조성 과정에서 보여줬듯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혼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사람은 외면했다. 대선에 대비해 도지사 임기 중 인적·물적 자원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위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손 대표 진영은 선거운동원들의 밥값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경선을 치렀다. 손 대표의 오랜 지인은 “그게 그 사람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했다.

정치적 식솔들을 거느려야 하는 당 대표는 그동안 그가 걸어온 길과는 아주 다른 직업이다. “고비 때마다 주변 의견과 다른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통에 모시기 힘들었다”는 한 초선 의원은 “요즘 손 대표가 많이 변했다”고 했다. 실제로 손 대표는 취임 직후부터 충청-인천-서울 등 각 지역의 민생현장을 도는 중에도 지역 의원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자신의 노선과 방향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스킨십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측근들과의 회의도 잦아졌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많은 것을 잃어온 손 대표가 이번엔 어떤 걸음을 옮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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