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에로배우 수식은 주홍글씨 같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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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흔히 ‘은퇴한 여배우’라고 하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해진 여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은퇴 후 진정한 행복을 찾은 이도 적지 않다. 배우에서 설치미술가로 전업한 강리나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강리나(43) 씨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은 길고 인생도 길다’고. 그도 그럴 것이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영화계에서 10년이나 배우로 살았던 강씨는 은퇴 후 12년간 미술가로 살았다. 그는 ‘변신’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라고….


강씨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워낙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와 전화로 약속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교회 근처에서 만나는 것을 조건으로 겨우 자투리 시간을 얻어냈다.

그런데 끝까지 애를 태웠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돼가는 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예정보다 2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그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미안한 기색도 잠시. 포트폴리오를 내밀면서 이것저것 설명하기에 바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 그만 웃음이 나왔다.

-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일이 즐거우신 거죠?
“네,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미술계 선배들 중에는 ‘왜 돈도 안 되는 작업을 하느냐’며 핀잔을 주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상업성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배우생활 10년간 쌓였던 한을 풀 듯, 그는 12년간 개인전만 17회나 열었다. 2007년 3월의 ‘아사달의 정원’이 가장 최근의 개인전이다.

“벌써 17번째라니 끔찍한 생각도 들죠. 하지만 미술가로서 책임감도 느꼈어요.”

전시회를 위해 전통 자개 장인을 무작정 찾아가 3년이나 공예를 배우기도 했다. 3년 내내 혼나기만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의미였다고.

인기가 절정일 때 연예계를 떠난 소회가 궁금했다. 혹시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림 없이는 못 살겠는데 어쩌겠어요?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처음부터 제 삶은 그림이었으니까.”

오만 버리니 일도 ‘술~술~’

‘제자리’로 돌아온 지난 12년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배우가 무슨 미술이냐’며 무시당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한 그룹 전시회에서는 배우 출신이라는 전력 덕분에 홀로 주목받아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은퇴한 여배우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때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겁나기도 했다.

배우로 살았던 시간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사람들이 저를 에로배우라고 기억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에로’의 의미가 변한 거죠. 요즘은 에로영화라고 하면 성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당시에는 에로의 어원인 ‘에로스’에 충실했다고나 할까요? 당시에는 ‘섹시’라는 단어 하나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에로영화도 성적으로 성숙한 어른들의 삶을 그렸다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세상은 공격적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요구한 사람마저 있었다.

“영화에 충실하기 위해 했던 일들이 결국 몸을 파는 여자로 인식돼버린 거예요. 에로배우라는 수식은 주홍글씨 같아요.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죠.”

하지만 그는 소신껏 살아왔다. 지나고 나니 “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덧 불혹을 넘겨 이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법도 배웠다.

“남들의 관점에서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는 이젠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럴 시간도 없고요. 다만 어려움을 겪다 보니 극적인 순간에 변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용서하게 되고, 나 잘났다고 살던 것들까지 반성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는 요즘 곧 들어설 초대형 테마파크의 디자인 컨설팅과 설계 디자인을 맡아 진행 중이다. 전도양양한 후배 미술가 이윰 씨와 함께 일하게 됐다. 그는 벌써 ‘나눔’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어느 정도 열매를 맺은 것 같아요. 이제 또 다른 열매를 맺을 사람을 위해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요.”

1983년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한 강리나 씨. “여자는 대학도 갈 것 없이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집안에서 자라온 터여서 그림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대학 4학년 때던 1986년, 스타일화 수업의 연장으로 들른 패션쇼에서 우연히 대학 선배를 만나 모델 제의를 받았다. 그렇게 우연히 청바지회사 ‘써지오바렌테’의 모델을 한 것이 반응이 좋아 곳곳에서 모델 제의가 들어왔다.

코카콜라·톰보이·금성 등 여러 광고에서 모델로 활동하다 영화계 사람들의 눈에 띄어 <대물>로 데뷔하게 된 것이 1988년. 이후 <거꾸로 가는 여자><웨딩드레스><변금련><증발> 등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외모만큼이나 도발적인 배역을 연거푸 맡으면서 ‘섹시 심벌’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1989년에는 영화 <서울무지개>로 대종상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미술에 대한 미련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방 촬영이나 외국 촬영 때는 항상 화구를 챙겼고, 촬영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면 늘 그림을 그렸다. 미술감독을 거들어 소품이나 세트의 미술작업에 참여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에 대한 그의 미련을 짐스러워하던 가족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작업실을 없애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내 그는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996년 영화 <알바트로스>를 마지막으로 홀연히 영화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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