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북녘동포>9.젊은이 思考 변하고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노동당 입당은 북녘 젊은이의 꿈의 원천이자 좌절의 관문이다.
젊은이의 입당은 입신(立身)의 첫발이다.노동당의 유일사회이기 때문이다.입당의 좌절은 인생의 실패를 뜻했다.
개병제가 아닌데도 군입대에 목을 매달던 것이 얼마 전까지의 상황이었다.군대생활중 입당의 기회가 높기 때문이다.그래서 제대병이 귀향하면 주위 사람들의 첫 마디가 『입당했느냐』는 질문이다.『입당을 못하면 사람대접을 못받는다.』(신광호.2 8) 최근 이같은 도식(圖式)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고 있다.돈벌이를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신성불가침의 노동당에 대한 비판도 초보적이나마 일어나고 있다.옷차림이나 몸매에도 멋을 부리려 한다.연애도 적극적이다.사랑을 주제로 한 남녘 노래를 부르며 디스코춤도 춘다.
▲노동당입당의 목표=입당 목적의 변화과정에 관한 김영성(金永成.61)씨의 증언은 인민들의 의식 변모를 잘 설명한다.
『60년대 전반 까지만 해도 입당목적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노력하기 위해서 였다.70년대부터 입당 목적은 출세를 위한 것으로 바뀌었고 70년대말부터 당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입당은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의 진로와도 직결된다.외교부 외교단사업총국재직시 입당한 고운기(高雲氣.45)씨는『당원은 신발신고 걷고비당원은 신발벗고 걷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군제대를 앞두고 막차로 입당한 만경대보석가공공장 외화벌이 지도원 김명철(金明哲.35)씨는『당원과 비당원은 평소에도 차별감을 느끼지만 막상 주간생활총화같은 회의때「당원들만 남고 비당원은 나가시오」라고 말하면 비당원은 누구나 수치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소년단을 마치고 사로청에 가입하는 시기인 고중(6년제)4년생은 누구나 「가계표」와 함께 희망직업을 일괄제출한다.14세의 청소년들은 이때 자기 일생의 운명을 대강 짐작하게 된다. 임정희(30.여).엄만규(38)씨의 증언-.
『고중4년때 부모의 입당여부가 공개된다.학생들은 이때부터 끼리끼리 모여 편가르기를 한다.부모가 당원이 아니어서 차별과 소외감을 느낀 몇몇 친구들은 「아버지는 왜 당원이 되지 못했느냐」고 집에 가서 따지기도 한다.그래서 남학생들은 자기라도 당원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군대에 가려고 한다.』 주민들의 입당노력이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인민군 중사출신 신광호씨의 증언-.
『아버지가 당원이 아니므로 아들인 나도 당원이 되기 힘들다는사실을 고중 4학년때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아버지는 그후 입당하기 위해 틈날 때마다 과외 일도 하고 정치학습에도 자발적으로참여하는등 노력했다.입당 심사시기에는 술조차 들 지 않았다.아버지는 입당이 되자 「이제 자식에게 떳떳하게 됐다」며 밤새도록울었다.』 청소년들은 1차적으로 입당펀드(할당몫)가 대학이나 직장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군에 입대하려고 안달이다.신광호씨는 『고중을 졸업할 때 쯤이면 누구나 대학 가는 것보다 군대가서 입당하는 것이 출세가 빠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질에 눈뜨는 젊은이들=90년대 젊은이들은 입당과 진로가 보장되는 토대문제에 대해선 이전보다 덜 고민하는 경향이다.당성보다는 돈이 최고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그 결과 돈많은 재포(북송동포)가 최고 인기를 얻고 있다(박수현.2 8).
황광철(21)씨는 『고중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직업은 운전수다.
공부를 잘하면 전자분야나 의사등을 희망한다』며 젊은이들이 더이상 「군입대=입당=출세」공식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여자는 재단사나 판매원등 편의봉사망 계통 의 직업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김명철씨는『80년대 중반이후 젊은이들은 토대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자기만 똑똑하면 출세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말했다. 주민들이 너나 없이 장사에 나서면서 이같은 인식은 더욱더 확산됐다.과학자나 박사들도 연구보다는 외화벌이가 관심사라는 것.청진의대생 박수현씨는 『의대에서도 졸업하면 장사하려는 학생들이 많다』며 『우리 세대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김광욱씨는 『부수입이 없는 교수가 되려는 학생은 없다』며『91년말부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젊은이들의 직업관도 식료.옷.담배.맥주공장등 먹는 문제와 관련된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선호하는 추세로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임정희씨는 『여자들도 고중 때부터 누가 더 빨리 당원이 되는가 경쟁했지만 지금은 입당에 관심이 없다』고 기억했다.
▲생활양태의 변화=의식의 변화는 생활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간생활총화에서 당이 요구하는 상호비판을 잘하지 않는 것이 신풍속이다(김동만씨).고청송씨는『70년대초 함남홍원에선 북송교포인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아들이 고발한 적도 있지만 이런 분위기는 옛날 얘기가 돼버린지 오래』라고 말했다.순종적이던 여성의 태도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청송씨는『북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남자에게 높임말을 쓴다.여자가 남편을 부를 때도「우리 세대주」「우리 영감」「우리 남 편」등으로 부르며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종적 남녀관계가 90년대 들어 바뀌고 있다.
『요즘 신혼부부들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조금씩 발언권을 세우고 산다.특히 남자가 사회에서 비판을 받고 건달생활이나 할 경우 토대가 좋은 여자라면 집안에서 이혼을 강력하게 권 유하므로 이혼율이 90년대 이후 높아지고 있다.』(조명순) 결혼상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도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최고신랑감은 김일성대학을 나와 정치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최근 의사.경제무역일꾼등 돈있고 활동력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조승희.여금주).신랑감으로 북송동포의 인기가 치 솟는 까닭이다.
▲남한노래와 디스코 유행=남한노래는 북녘 젊은이들 사이에서「연변노래」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고 대개는 연변가수들이 약간 편곡한 것들이 많다.『남한가요 테이프가 널리 퍼져있다.북에 있을 때 남한노래 테이프를 8개 갖고 있었다.그중에 「소양강처녀」,현철의「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이미자의「동백아가씨」,남진의「새까만 눈동자의 아가씨」등을 자주 불렀다.』(박수현) 『88년께 중국을 통해 들어온 남한노래 테이프를 친구에게 빌려 복사해 야유회때 노래를 불렀다.간혹 외부노래 테이프의 색출.수거바람이 부는데 이때만 잘 넘기면 된다.「사랑의 미로」는 개사돼 북한의「세계민요집」에도 실려있다.』(김광욱) 『89년 평양축전당시는「갑돌이와 갑순이」「사랑의 미로」「잘있어요 잘가세요」「바람 바람 바람」등을 수록한 복사테이프가 많이 돌았다.길거리에 녹음기를 내놓고「연변노래」를 크게 트는게 유행이었고 보천보전자악단의 디스코풍 노래가 젊은이 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이정철.27) 『평양의 아파트에서도 연변가요 테이프에서 배운 노래를 주변친구들과 조용히 부른 일이 있다.친구들은 「봉선화연정」「두만강」「황성옛터」「홍도야 울지마라」「낙화유수」등을 대개 알고 있었다.』(김명철) 『군에 있을 때「당신은 모르실거야」를배워 기타를 치면서 불렀다.남한가요인지 몰랐다.여단 운수지휘부운수중대장이「잘했군 잘했어」를 연변노래 혹은 대남방송용으로 알고 개사,방송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남한노래라는게 밝혀지자 테이프를 없 애는 소동도 있었다.89년 8월 제대하니 녹음기 회수소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시골로 갈수록 정보부족과 단속이 심하지 않은 탓에「연변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박수현) 『평남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북송동포에게 녹음기를 빌려 남한가요 테이프를 들었다.조용필.주현미.현철등의 노래를 알았다.한 소대(돌격대는 군대편제)에 1~2명은 남한가요를 알고 있었다.』(김형만) 평축 이후 북한당국은 남한가요 보급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단속에 나섰다.『91년께 모란봉공원에서간부 자제가 연변노래를 듣다 잡혀 아버지까지도 혁명화사업(강제노역)에 내려간 사건이 있다.』(윤웅) ***람바다등도 공연 그러나 90~91년 고려호텔의 무도회장에서는 트로트가요「번지없는 주막」,팝계열의「람바다」등이 공연되고 젊은이들이 즐기는게 당시 방문한 외국인의 비디오자료로 확인됐다.
북한에도 89년 평양축전 이후 디스코 열풍이 한차례 휩쓸어 젊은이들의 놀이풍조를 바꾸어 놓았다.
『평양축전을 맞이해 당국이 군중무용을 디스코식으로 개조해 가르친 것이 평양시민들에게 유행했다.친구.가족끼리의 들놀이에서 디스코 춤판이 벌어지곤 했다.지방도 점차 평양의 이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윤웅) 『함흥에서는 역전이나 공원에서 고등중학생들이 녹음기를 크게 틀어놓고 디스코를 추곤 했다.성천강가에도 맨 춤판이다.함흥의 춤바람이 얼마나 심했는지 중앙사로청이「날라리춤을 추지말라」는 강연회를 개최할 정도였다.』(고청송) ▲의식변화의 여러 계기=신상옥.최은희씨의 영화,89년 평양축전,동구의 붕괴등이 상승작용을 해 젊은층의 의식변화를 일으키게 한 계기가 됐다.
안혁씨는『축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많이 개방됐으며 그 이전에 신상옥씨의 영화가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확산에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정리했다.
임정희씨 역시『90년대 들어와 여자들이 연애하며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경우도 많아졌다.최은희.신상옥씨의 영화가 변화에 영향을 끼친 점도 있다.신필름에서 만든 「사랑사랑 내사랑」「소금」등은 키스신등이 나온다』고 동의했다.
고청송씨는『89년부터 동구권이 몰락하고 중국이 변하며 서양문물이 들어왔다.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며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반대로 주민들의 의식은 깨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