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를향한무비워>18.런던에 부는 할리우드 돌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공습경보가 울리는 안개 자욱한 워털루 다리.청순한 인상의 발레리나(비비언 리扮)와 기품있는 용모의 고급장교(로버트 테일러扮)의 슬픈 운명으로 치닫는 사랑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됐다.머빈 르로이 감독의 영화 『애수』(원제 Waterl oo Bridge).
6.25직후 암울했던 시대에 국내에 개봉됐던 영화『애수』는 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안고 희극적인 종말보다 비극적인 종말을 선호(?)하는 한국 올드팬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로 기록돼 있다. 영화 배경은 1.2차 세계대전,또 美 MGM社에 의해 영화가 제작된 게 1940년의 일이고 보면 『애수』는 이미 55년전의 「옛날영화」임이 틀림없다.
두 연인의 만남.사랑,그리고 이별의 무대가 됐던 워털루 다리는 런던 한복판에서 찾을 수 있다.런던 사보이 호텔이 있는 스트랜드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워털루 다리는 템스강을건너 사우스뱅크쪽으로 길을 대고 있다.
그러나 다시 찾아간 런던의 워털루 다리주변에서 변함없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리밑에 무심히 흐르고 있는 템스강물 뿐이다. 당시 영화 배경이 된 워털루 다리는 1945년 2차대전중 파손돼 간데없고 같은 해 재건된 새로운 워털루 다리만이「애수」를 안고 찾아드는 관광객을 쓸쓸히 맞고 있다.
다리위에는 이제 공습경보대신 자동차 경적만이 울리고 있는가하면 대피소로 향하던 인파대신 찬바람속에 바바리 코트깃을 세우고바삐 걷는 시민들만이 눈에 띈다.
다리 남쪽인 사우스뱅크 지역은 현재 국립극장.국립영화관,그리고 로열 페스티벌홀이 자리잡고 있어 문화생활을 즐기는 런던 시민들의 본거지가 돼 있다.
또 영화속의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 함께 대피하고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다시 각각 귀환장병과 거리의 여인이 돼 다시 만난 워털루 역은 사우스뱅크쪽에서 다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영화『애수』의 상영시간 전분량(1시간43분)은 美MGM세트에서 촬영됐다.런던의 워털루 다리는 다만 미국영화에 타이틀의 무대로만 등장한 것이다.
예전에 워털루역 주변은 소매치기.창녀.주정꾼의 거리로 악명높았다고 하니 발레리나였던 마일라가 사랑때문에 일터를 잃고 거리의 여자로 전락해 워털루역에서 손님을 잡아끌던 모습은 그다지 허황된 얘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애수』의 원작자가『우리생애 최고의 해』를 썼던 미국의극작가 로버트 셔우드였다는 사실과 감독 머빈 르로이는 16세때의상담당 조수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전형적인 미국 감독인 점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애수』뿐 아니라『마음의 행로』(1942),『푸른 화원』(1949),『쿠오 바디스』(1951)등의 작품을 통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머빈 르로이 감독은『여성취향의 영화에서 리얼리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자만심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너무 쉽게 순응하고 비극의 결말로 스스로 몸을 던진 여주인공의 행동이 앞으로도 영화팬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또 50년대이후 사양길을 걷기 시작,현재 영국 영화시장의 80%이상을 할리우드에 잠식당한 영국영화산업.
지난 10여년 동안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할리우드의강풍에 저항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앞날은 다리위의 안개만큼이나 불투명하다.
비비언 리(67년 사망)와 로버트 테일러(69년 사망)가 세상을 떠난지도 20여년,감독인 머빈 르로이도 87년 세상을 떠난 지금 다만 변함없이 흐르는 템스강만이 날로 쇠약해가는 워털루 다리를 지켜보고 있다.
런던=李殷朱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