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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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우리는 늦은 저녁식사로 스파게티와 계란 스크램블과 스팸을 먹었다.맥주도 네병이나 마셨는데 거의 반반씩 마신 것 같았다.써니는 여전히 아랫도리는 드러낸 채로 발을 꼬고 앉아서였다.
써니는 내가 왜 국문과를 택했는지,학교 생활은 재미가 있는지등등을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물었다.나는 윤찬이와 희수와 소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담임선생으로 불리던 노교수가 왜 학교를 떠나게 됐는지와,소라가 노교수를 위해서 여학생회 간부들과 다툰 일 따위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너희 학교 근처에 갔었는데…,버스 정류장에서 니가 날 알아보고 쫓아왔던 적이 있었어.기억나지? 그때 너하고 같이있던 여자애… 걔가 소라라는 애 맞지? 늘씬하고 아주 멋있는 애였어.』 써니가 말하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어려서는 아역 탤런트도 하구 그랬대.질투하는 건 아니지?』『같이 잤어?』 『웃기는 소리 하지마.가끔 우리집에 전화해서 그냥 전활 끊어버리구 그런 것두 너 맞지?』 『그래,그런 적 있어.말해봐.걔랑 같이 잤어?』 『아니라니까.우린 그런 사이가아니란 말이야.』 『우리라니…?』 『제발 엉뚱하게 굴지마.소라는 그런 애가 아니라니까.』 써니가 마치 아무래도 좋다는듯이,혹은 그저 너를 놀려먹기 위해서 물어본 거라는듯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들을 치웠다.
써니가 잠깐 샤워를 하겠다면서 욕실로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창가로 가서 창을 열었다.고 창틀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창밖 아래로 불빛들이 보였다.그 방마다에 들어찬 사람들이 무언가 불빛 아래서 사연을 만들어내고 있을 거였다.나 는 담배연기를 푸우 푸우 뿜어댔다.그러면 찬 밤공기가 연기를 몰고 가버렸다.아,써니가 돌아온 것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써니는 두꺼운 타월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터번처럼 쓰고칫솔을 입에 물고 욕실에서 나왔다.써니의 몸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 닫을까.감기 들겠어.』 써니가 창틀에 나하고 마주보고앉았기 때문에 내가 그랬다.
『아냐.션해서 조어아.』 칫솔질을 하다말고 거품을 문 채로 써니가 겨우 말했다.
나는 창밖으로 꽁초를 던져버리고 새 담배에 또 불을 댕겼다.
그러는 걸 보고 써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나는 어깨를한번 들썩해 보이고는 담배연기를 내뿜어댔다.우리는 가끔 서로를바라보고 소리없이 웃었고 아니면 창 아래의 불 빛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정말… 난 믿어지지가 않아.요술같아.』 내 말에 써니가 한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그러면서 써니는 약간 슬픈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어.두 달 전에….』 나는 양미간을 좁히고 써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미국에 가 있었거든.아빠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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