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써니와 나는 빈 찻잔을 각자의 앞에 두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우리는 서로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오분이고 십분이고 소리없이 앉아 있고는 하였다.간혹 핑 눈물이 돌기도 했고(써니의 눈도 젖었다가 말았다가 하였다),그러다 가 말없이 서로에게 웃어보이고는 하였다.
『어쨌든… 써니가 살아있다는 게 기뻐.』 그러면 써니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주는 것으로 또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앉아 있었다.노래들이 들리다가 말았다가 하였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제 정신이 들면 문득 노래가 다시 들리곤 했던 거였다.
다이애나 로스의 「언젠가 다시 만나리」도 나왔고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도 흘러갔다.「날개」의 주인 아주머니가 젊은 시절에알던 노래들을 트는 걸 거였다.나이든 사람들은 왜 새 노래에 익숙해지기를 힘들어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잠깐 궁금했었다.
써니가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더니 셈을 치르고 돌아와서 말했다.써니의 목소리가 엉키고 있었다.
『여기서…나가지 뭐.』 우리는 겨우 택시를 잡아탔는데,써니는서대문에서 광화문으로 넘어가는 언덕빼기 근처에서 택시를 서게 했다.거기는 기상청 뒤쪽이었고,3층인가 4층짜리의 낮은 아파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 사는 거야?』 『몇달씩 임대하는 아파트라서 외국사람들이 많아.』 303호실 문 앞에서 써니가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열었다.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는데 한번에 열리지가 않았다.
열쇠주인들이 자주 바뀌니까 그런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늘 이래.왜 그런지 모르겠어.』 써니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나는 어서 빨리 써니를 열고 싶었다.써니에게 딱 맞는 열쇠가 내게 있다면 써니의 몸과 마음을 활짝 열고 싶었다.
아파트 문이 열리고,우리가 거기에 들어서서 다시 문을 걸어잠그고,써니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방 한가운데 바닥에 떨어뜨리고,우리는 아까 백화점 매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꼬옥 부둥켜안았다.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구경하고 있지 않았 다.더욱이 불을 켜지 않아서 아주 깜깜했다.
나는 두 손으로 써니의 얼굴을 감싸고 써니의 이마에 코에 감은 눈꺼풀위에 입을 맞췄다.그리고 써니의 입술에도 그랬다.써니가 입술을 열고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입술끼리 맞댄 자세로 써니가 코트를 벗어던졌다.어두운 게 다행이었다.우 리는 마음놓고 껍질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저쪽이야….』 침대에 엉켰을 때는 벌써 완전한 알몸이었다.
나는 써니의 온몸에 입을 맞췄다.그러면서 나는 써니의 냄새를 기억해냈다.써니가 내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갈퀴질해주었다.우리는엎치락뒤치락하였다.
써니가 내 위에 왔을 때 나를 내려다보면서 속삭였다.
『그렇지만… 그냥은 안돼.위험해.』 『그럼…밖에다 할게.』 『안돼.그거 없으면… 위험해서 할 수 없어.』 써니가 내게서 몸을 떼어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