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實利 좇은 또 다른 홍길동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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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35면

그 많은 홍길동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얼(庶孼) 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조항에 좌절한 그 홍길동들 말이다. 물론 무과(武科)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무과를 통한 출세도 그리 여의치 않게 된다. 벼슬하고 싶은 양반은 많고 관직은 일정하고, 유수한 양반들이 점점 무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홍길동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서얼허통’(서얼들도 문과를 볼 수 있게 하는 것) 운동이나 ‘율도국’ 건설에 주력했을까?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갈 때 고위 관직자로서 따라갔다. 부인 조씨는 남편이 언제나 돌아올까 노심초사했다. 결국 천남이가 심양 길을 나선다. 천남이는 남이웅의 서자이다. 심양 길은 정확히 석 달 보름이 걸렸다. 9월 10일에서 12월 26일까지. 이 긴 기간을 할애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천남이가 집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씨 부인은 “아들자식이라 거기까지 가서 뵙고 오니 귀하게 생각된다”고 고마운 심정을 술회했다.

석벽이 낳은 노상추(盧尙樞, 1746~1829)의 첩자 승엽도 마찬가지다. “서자 영엽을 데리고 딸네 집에 갔다” “영엽이 겨우 16세인데, 간병하느라고 주야로 곁에서 지키며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으니 부자간의 은혜를 볼 수 있다” “승엽이 종 두 명을 데리고 왔으니 보리타작을 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영엽은 승엽의 옛 이름이다. 19세기 전후 무슨 이유인지 개명(改名)이 유행이었다.

승엽은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봉양하고 집안관리를 했다. 노상추의 큰아들이자 적자인 익엽이 무과를 거쳐 흥덕 수령에 이르는 동안 온전히 집안을 책임진 것이다. 승엽도 무과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합격하지 못했다. 노상추는 승엽의 과거 응시에 별반 기대를 보이지 않는다. 익엽을 바라볼 때와 다르다. 아마도 이 시기 승엽은 마음속 갈등이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승엽은 율도국으로 가지 않는다. ‘서얼허통’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도 않는다. 아버지 수행, 병간호, 집 짓는 일, 농사 관리 등을 하며 집안에 머문다. 노상추의 승엽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더 높아갔다. ‘허통’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모든 서얼이 다 운동권이 된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을 살아내는 더 많은 서얼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가문(家門)은 하나의 기업과도 같았다. 가문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조선이 망할 때쯤에는 국가는 없고 가문만 있을 정도였다. 조선이 초기에 사회운영의 책임을 일정 부분 가족에게 맡긴 것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다. 어쨌든 기업과도 같은 가문은 종손이라는 최고경영자(CEO) 외에 실무진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홍길동들이 했던 것이다. 이들은 꾸준히 집안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키워갔다. 특히 경제력을 확보했다. 이는 ‘허통’과는 또 다르게 서얼들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줬다. 드러난 운동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서얼들의 삶을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