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치열해진 대학가 학점 전쟁 “A 아니면 F를 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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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15면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한 학생들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학생들은 학점이 나쁘면 교수에게 성적 정정을 요구하고, 재수강하는 일도 많다. [중앙포토]

#1. 김동현(26·한국항공대 항공우주기계공학 3)씨는 겨울방학인 요즘 계절학기 수강을 위해 매일 학교에 간다. 김씨는 “1학년 때 D0를 받았던 ‘재료역학’을 A0로 높이는 게 목표”라며 “취업을 위해 C+이하 4과목을 재수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의 평균 학점은 4.5점 만점에 3.4점. 김씨는 “평균 B+에 가까운 학점이지만 졸업과 함께 취직하려면 평점 3.8점은 돼야 한다”며 “4학년 때는 모두 A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2. 포항 선린전문대 간호학과의 동아리 ‘아나토미’는 해부학 공부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로는 학점을 잘 받기 위한 스터디 모임이다. 다른 동아리와 달리 회원 30여 명은 성적 순으로 뽑는다. 학년에서 20등 안에 들어야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성적이 떨어지면 나가야 한다. 선배에게서 물려받은 족보를 회원들끼리 돌려보며 시험 공부를 한다. 이 학교의 최모(23·여)씨는 “시험이 다가오면 족보 현찰 거래가 암암리에 이루어진다”며 “3~4년치 족보를 복사해 과목당 3만원에 판 적이 있다”고 말했다.

취업문이 날로 좁아지면서 대학생 사이에 학점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지고 있다. 7일 서울 S대 계절학기 김모 교수의 ‘리더십과 의사소통’ 수업 시간에 김모(26)씨가 “정말 이렇게 끝까지 가셔야겠습니까”라며 거칠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씨는 지난 학기 같은 과목에서 B+를 받고 성적을 올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김 교수는 거절했다.

그야말로 ‘학점 전쟁’이다. 학점이 잘 나오는 과목만 골라 듣는 ‘학점 쇼핑족’부터, C+이하의 학점을 받으면 무조건 재수강을 하는 ‘재수강족’까지 생겼다. 연세대의 경우 이번 겨울 계절학기의 수강 신청 1만9641건 가운데 31.3%인 3745건이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한 재수강 신청이다.

학기 말 성적 정정기간이 되면 학점을 올려달라는 청탁과 항의전화로 교수들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예전에는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이 “졸업을 해야 하니 낙제는 면하게 F를 D로 올려 달라”는 읍소형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2, 3학년들도 “왜 내가 B+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A로 올려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이화여대 사회과학대 김모 교수는 “지난 학기에 B를 맞은 학생이 ‘A로 올려주든지 아니면 재수강하도록 F를 달라’고 요구해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결국 그 학생에게 F를 줬다. 고려대 박현진(생명과학대) 교수는 “지난 학기 강의한 교양과목 ‘포도주 개론’을 수강한 학생 130명 중 B·C를 받은 학생 세 명이 재수강을 하겠다며 F학점을 달라고 해서 고민 끝에 F학점을 줬다”고 말했다.

대학가 학점 전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신입사원 모집 때 학점이 낮으면 서류전형에서 떨어진다. 대부분의 기업이 평균 3.0점 이상을, 금융권은 더 높은 점수를 요구한다. 현대증권·현대카드는 2008년 신입사원 채용 때 평점 3.5점 이상을 지원 자격으로 내걸었다. 강준호(26·인하대 경영학과 3)씨는 “평점 4.0점은 넘어야 공기업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채용 정보사이트인 잡코리아의 황선길 본부장은 “구직 희망자가 많은 상황에서 학점을 B 이상으로 제한하면 서류 전형에서 솎아낼 수 있다”며 “기업이 학점을 거름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직자의 평점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LG텔레콤의 경우 2003년 서류 전형 합격자의 평균 학점이 3.4점이었으나 지난해는 3.8점으로 올랐다. 삼성 계열사의 인사팀 관계자는 “서류전형 합격자 평점이 3.8~3.9점 정도”라며 “학점을 성실성의 지표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의 이직이 잦아지고, 경력직 채용이 활발해지면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점’이 중요해졌다. 샐러리맨(salary man)과 스튜던트(student)의 합성어인 ‘샐러던트(saladent)’, 즉 공부하는 직장인이 느는 평생 교육시대에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도 좋은 학점을 받아두는 것이 유리하다.

심새롬(23·이화여대 정외3)씨는 “직장을 다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인생이 언제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데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로스쿨이나 의치학전문대학원 준비생들도 학점에 민감하다. 의치학전문대학원 준비학원인 PMS 정남순 본부장은 “대부분의 대학이 B+ 이상에게만 지원 자격을 주고 있으며 지난해 합격생들의 평점은 A-였다”며 “이과생들로서는 상당히 높은 성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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