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개미 구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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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2국 하이라이트>

○·박영훈 9단(한국) ●·구 리 9단(중국)

장면도(167∼176)=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167 젖힐 때 사신처럼 다가온 168의 그림자를 구리는 보지 못했다. 그가 169로 A의 끝내기 맛을 없애며 승리의 만족감에 젖어들 때 박영훈 9단이 온종일 고통스레 굽어 있던 허리를 부시시 폈다. 170, 172를 선수 하더니 174로 뚝 끊었다. 이 돌연한 움직임에 구리는 순간 움찔했다. 판을 쏘아보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한 가닥 전류가 등골을 뚫고 지나갔다. 그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174가 오면 B의 연결이 가능해진다. 168과의 콤비네이션이다. 동시에 C의 축이 성립한다. 죽어있던 돌들이 강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물 쓰듯 쓰며 사태를 주시하던 구리가 175라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축을 방지하면서 B의 연결도 막아내는 호착. 백의 노림은 치밀했지만 결국 여기까지인가.

아니었다. 176이란 빈삼각의 묘수가 있었다. 다시금 해일 같은 충격이 구리를 후려쳤다. ‘바보 같으니’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176이 놓이면 B의 연결이 부활한다. 따라서 ‘참고도’ 흑1로 연결을 차단해야 하는데 이번엔 2부터 4로 몰아치는 수단이 있다. 12까지 대형 꽃놀이패가 발생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D의 곳은 언제나 흑의 선수였는데 이곳을 해두지 않는 바람에 수가 났다. 개미 구멍 하나로 둑이 무너지게 생겼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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