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를찾아서>19."민족문학과 세계문학" 白樂晴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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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978년,뒤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Ⅰ』로 제목이 바뀜)은 백낙청(白樂晴)교수가 평론활동을 시작한지 햇수로 14년만에 출간된 첫 평론집이다.이 책에는 66년부터 78년 사이에 씌어진 글들이 실려 있으니 박정 희(朴正熙)군사정권의 상승에서 몰락에 이르는 거의 전 시기가 이 책의 역사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보겠다.그렇게 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군사적 폭력과 냉전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개발독재가 우리사회 전체를 옥죄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탁월한 비평적 증언이라고 할 만하다.나아가 이 책은 근 30년동안 우리문화지형에서 최선도적 지위를 굳게 지켜온 이론가 겸 실천가인 개인이 10년이 넘도록 겪어온 지적 고뇌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민족문학운동 전체가 한 탁월한 개인을 매개로 발전해가는 사회적 과정의 소산이기도 하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1부에는 「시민문학론」(1969),「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1973)등 저자가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온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번째 글은 서구역사의 시민혁명기에 시민계급이 담당했던 진보적인 역할을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 한편,그 진보성이 자본주의가정착되는 과정에서 결국 퇴색되고 마는 과정을 서구의 고전적 작품에 대한 폭넓은 분석을 통해 드러내 보인다.저 자는 이러한 시민계급의 진보성이 단순히 역사적 과거가 되어버린 특정한 시기,특정한 계급의 경향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근본적인 가치라고 보고,훌륭한 문학작품은 이 가치를 실현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글은 문학이 담아내는 역사적 현실이「객관적」인식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밑바닥에 깔면서,문학과 사회적 실천이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입증해보인다.문학.과학.진리.
실천등의 상호관련이라는 이 글의 핵심적인 주제는 장차 「학문의과학성과 민족주의적 실천」「작품.진리.실천」(『민족문학의 새 단계』1990)에서 좀더 분명한 형태로 개진되는데,이 글들은 白교수가 지닌 입장의 이론적 토대를 이해하는데 불가결할 뿐더러서구식 형식논리의 편견없이 접근하 는 독자에게는 앎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줄 것이 분명하다.
2부에는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1974),「현대문학을 보는 시각」(1974),「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1977)등이 실려 있는데,첫번째 글은 여전히 우리 문학계의 진보적 흐름을 대표하고 있는 민족문학운동의 이념적 입 지를 비교적간명하게 정리하는 글이다.저자는 『민족의 주체적 생존과 그 대다수 구성원의 복지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판단에근거해 그같은 현실에 올바로 대응할 수 있는 문학,곧 민족문학의 필요성을 내세운다.
나아가 저자는 이런 입장이 선진국의 문학적 전통을 주체적으로수용하는 한편,민족적 입장에서 우리의 문학적 성과를 재발견하는것을 가능케 할 것임을 논증한다.
「시적 인간과 역사적 인간」은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토대를 다지는 작업의 일환으로 씌어진 글로 당시 문학 지식인 사이에서 세를 넓혀가던 구조주의적 입장의 비역사적.탈정치적 성향에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그 과정에서 白교수는 구조주의 에 내재하는문학과 현실을 분리해 생각하는 태도야 말로 비문학적인 태도이며,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김수영 시인의 『시는 온몸으로,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빌려 역설한다.
이 글에서 제시된 입장은 그이후에 발 표되는 「리얼리즘에 관하여」「모더니즘에 관하여」(『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Ⅱ,1985)등의글에서 그때그때 문학계의 지형에 맞추어 발전된다.
3부에 실린 「콘래드문학과 식민주의」「D H 로렌스의 소설관」등의 글은 저자의 전공영역인 영문학의 작가들을 주로 다루면서도,그들에 관한 논의를 우리 문학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한다는점에서 외국문학 전공자면서 비평을 겸업하는 대■ 수 비평가들과白교수의 차이를 보여준다.
4부는 김수영.신경림 등에 관한 작가론을 위시해 그때그때의 사회적.문학적 정세를 분석하고 또 전망하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5부는 『창작과 비평』창간호의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로 되어있다.이 논문은 저자 자신이 논 조에 부분적으로 불만족을 표명하고 있지만,씌어진 시기의 여러 상황에 비추면 놀랄 만큼 앞서간 입장과 통찰들을 담고 있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았지만,일목요연한정리는 애초 불가능한 것이 이 책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 책이 일관된 체계를 지닌 저서가 아니라 10여년에걸쳐 구체적 정황에 대응해서 씌어진 글들을 모은 것이라는 이유보다는,책 속에 담긴 생각의 폭과 넓이에서 기인한다.
사실 시민문학론의 연장선에서 제기되는 농민문학론.민중문학론,그리고 그것의 원론적 입지점으로서 리얼리즘론등 우리사회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이끌어온 입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白교수의 분단체제론도 이 책에 실린 글들에 이미 그 주된 논거가 나오고 있다.그런 뜻에서 이 책은 요약.
정리에 기댈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정독함으로써만 그 참 가치가드러나는 드문 경우에 든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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