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식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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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식객’-안현미(1972~ )

미술관 앞에서 애인처럼 만났다. 빨간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수영장과 목욕탕을 지나 라일락 꽃나무 아래서 마늘빵을 나눠 먹었다. 책방에 들러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란 제목의 똑같은 책을 사서 나눠 가졌다. 커플링처럼 나눠 가진 책.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으로 봄비가 왔다. 음악이 왔다. 고독도 왔다. 같은 제목의 책을 나눠 지녔듯 같은 착각을 나눠가졌다. 그 사이 애인들이 왔다. 아랍탁자와 아랍 탁자 사이. 시간은 봄비와 음악과 고독을 연주하고 애인들은 달콤했다. 네팔 고산에서 야생하는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를 불에 구워 얇게 썬 사과와 함께 먹는 맛처럼. 같은 착각을 마지막까지 나눠갖고 손을 흔들었다. 시구문 밖으로 들어서자 시간은 할증으로 포맷되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봄은 춘궁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대여, 오늘은 같은 착각을 나눠가지자. 우리는 애인이 아니라 애인처럼 만나 울고 사랑하지만 미술관 앞 라일락꽃나무 앞에서 만날 때는 마늘빵을 나눠먹자. 헤어질 때는 아쉬운 척 같은 제목의 책을 사서 커플링처럼 나눠가지자. 착각이라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보자. 우리는 그저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에 초대된 식객이고 서로 스쳐가는 낯선 행성들일 뿐이다.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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