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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국적 속인 어느 여배우의 親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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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34면

리샹란의 전성기 모습. [김명호 제공]

리샹란(李香蘭)은 1920년 랴오닝성(遼寧省) 펑톈(奉天, 오늘의 瀋陽)에서 태어나 12살까지 탄광지대인 푸순(撫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滿洲)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문화적으로는 전형적인 만주인이었지만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혈통상으론 완전한 일본인이었다. 사가(佐賀)현 출신인 조부는 한학자였고 부친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으로 이주해 만철(滿鐵, 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 근무하며 일본인 직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던 중국통이었다. 심양은행 총재인 퇴역장군 리지춘이 그의 친구였다. 리지춘은 일본인 친구의 어린 딸을 귀여워해 수양딸로 삼았다. 샹란(香蘭)이라는 중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샹란은 리의 필명이었다.

13살 때 푸순을 떠나 펑톈여고에 전학했다. 이때부터 리샹란이라는 이름을 썼다. 음악과 미술에 소질이 있었고 중국어 작문은 전교에서 2등을 했다. 우연히 친구 소개로 펑톈에 와 있던 이탈리아 성악가를 알게 됐다. 리샹란에게 이탈리아 민요, 독일 가곡, 러시아 민요를 3개월간 집중적으로 가르친 후 전당포에서 빌린 기모노를 입혀 무대에 세웠다. 처음 입어보는 일본 옷이었다. 독일 가곡과 러시아 민요를 불렀다.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만주국은 이 어린 소녀에게 국책가요인 ‘만주신가곡’을 취입하게 했다. 그러나 부친은 딸이 정치가의 비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 정객을 의부로 삼아 학업을 계속하게 했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톈진(天津)시장인 친일정객 판유구이(潘毓桂)가 리샹란의 의부가 됐다. 그의 집에 살며 판수화(潘淑華)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학교에 입학했다. 펑톈을 떠날 때 부친은 중국인 전용 열차표를 사주며 “오늘부터 중국인으로 행세해라.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을 익혀라”고 말했다. 판씨의 집은 10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사는 대저택이었다. 일본인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천안문 서쪽의 전형적인 북경 골목에 살며 리샹란은 점점 중국인이 되어갔다. 음식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오리구이보다 동라이순(東來順)의 양고기를 더 좋아했고 인사를 나눌 때도 고개만 까딱하고 마는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군부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국무원은 만주영화협회설립법안을 통과시켰다. 만주국과 만철이 반씩 출자해 신징(新京, 오늘의 長春) 황롱(黃龍)공원 건너편에 만주영화제작소(만영)를 설립했다. 약 160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영화제작소였다. 만주인이 보는 영화를 만주인이 만든다고 했지만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선전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을 미화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정확한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고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스타가 필요했다.

만영의 첫 번째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된 리샹란은 ‘백란의 노래(白蘭之歌)’와 ‘지나의 밤(支那之夜)’에 연달아 출연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는 애정물들이었다. 주제가를 직접 불렀고 부르는 노래마다 크게 유행했다. 80년대 대만가수 덩리쥔(鄧麗君)이 불러 대륙을 열광시킨 ‘임은 언제 다시 올까(何日君再來)’와 ‘밤이 오는 향기(夜來香)’를 처음 부른 것도 리샹란이었다. 위문공연에도 수시로 동원돼 일본 군인들의 향수를 달랬다. 어디를 가나 중국인 리샹란으로 소개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중·일 친선의 상징이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국민정부는 상해에서 리샹란을 체포해 일본에 부역한 한간(漢奸)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부모가 호적등본을 제출했다. 풀려난 리샹란은 고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국과 고국이 달랐다.

리샹란은 한국과도 인연이 많았다. 경성(京城)에서 공연을 했고 명망가들이 베푼 만찬에 한복을 입고 참석해 자태를 뽐내기도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남편과 서울에 몇 년 머물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는 날까지 그가 왕년의 리샹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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