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핀 꽃은 정녕 일찍 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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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최근 4~5년 사이 재계에서는 ‘혜성’이 명멸하고 있다. 화려하게 ‘조직의 별’에 오른 30대 임원이 그들이다. 과장이나 차장을 할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들은 ‘별’이 되기도 하고 ‘혜성’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왜 발탁되고 사라지는가?


[중앙일보 DB]

20대 임원 신화’ ‘천재 소녀’‘재계 신데렐라’ ‘최연소 여성 임원’….

지난해 12월 24일 윤송이(33) 전 SK텔레콤 상무가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 매체는 윤송이 전 상무의 이름 앞에 갖가지 수식을 붙였다. 2004년 3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등장한 그는 퇴장 역시 화려했다.

모양새가 화려했던 만큼 사표에 대한 해석도 분분했다. 거대 조직에서 젊은 에너지를 소모 당해 안타깝다는 의견,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평가절하, 또 다른 사퇴 이유를 궁금해 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당분간 쉬고 싶다”는 본인의 단순한 해명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윤 전 상무가 이처럼 주목 받는 이유는 그의 SK그룹 승선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2004년 3월 미국 MIT 박사 출신의 그를 직접 영입했다. 최 회장은 윤 전 상무와 크리스마스 때 봉사활동을 같이 할 정도로 이 젊은 임원에게 각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게다가 그는 ‘천재 소녀’였고 상당한 미모를 지녔으며 언론매체에 기고하는 글 솜씨 또한 탁월했다.

하지만 문제는 실적이었다. 그가 주도했던 ‘1mm’ ‘T인터랙티브’ 서비스는 ‘파격 등용’에 해당하는 성과를 기대했던 이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출중한 실력을 가진 것 같았던 그가 왜 성과를 내지 못했을까?

업계의 한 관계자는 “윤 전 상무가 주도한 사업은 당장 매출이 일어나기 어려운 실험적 서비스였다”면서 “만약 연구원으로 영입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젊은 임원이 조직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윤 전 상무의 사표 제출 건은 일반인들이 입에 올릴 만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기도 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최근 몇 년 동안 재계를 휩쓴 이른바 핵심인재 영입 붐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소리도 높다. 요란한 팡파르에 비해 성과가 기대만큼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30대 임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외환위기를 전후해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0대는 물론 40대 임원조차 흔치 않았던 기업조직에 이들이 등장한 것은 연공서열 대신 성과주의를 도입하면서였다. 능력에 따라 차등 보상하겠다는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신수종 사업 등을 주도할 ‘새로운 피’도 필요했다.

가장 먼저 ‘별’을 단 새로운 피는 경영 컨설팅 회사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해당 기업에 경영·전략 컨설팅을 하다가 오너 눈에 띄어 임원으로 영입된 케이스가 많았다.

게임업체인 위메이드를 이끌고 있는 서수길 대표는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로 활동하다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을 만났다. 2002년 당시 벤처 컨설팅을 하던 그는 최 부회장의 설득에 따라 SK C&C 상무로 35세에 별을 달았다.

역시 컨설팅 업체인 매킨지 출신인 최병인 효성 사장은 39세 때인 2000년 조석래 효성 회장의 삼고초려를 받았다. “회사에 들어와서 직접 경영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간곡한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김충현 LS전선 상무도 38세 때인 2003년 컨설팅 업체인 부즈앨런에 있다가 구자열 LS전선 부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삼성에서 시작된 핵심인재 바람이 불면서 ‘될성부른 떡잎’을 미국 등 현지에서 영입한 케이스도 많았다. 이번에 물러난 윤송이 전 상무도 2002년 최태원 회장이 직접 영입한 케이스다.

최태원 회장은 자신이 직접 출자한 와이더덴닷컴 이사 자리에 윤 전 상무를 앉혔다. 윤 전 상무는 최 회장의 부인인 노소영 나비아트센터 관장과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핵심인재들은 특히 신사업 분야에 주로 포진했다. 이수영 코오롱 상무가 대표적이다. 그는 그룹 전체의 체질을 바꾸고 있는 코오롱에서 ‘웰니스’(Wellness)라는 신사업을 이끌었는데 2004년 이웅열 회장이 36세의 이 상무를 직접 발탁했다.

현재는 물·태양전지 등 신규사업을 맡고 있다. 이 같은 핵심인재 유치 바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다국적기업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발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이런 식으로 영입된 30대 임원은 50대 그룹 기준으로 250~3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외환위기 10년이 넘은 지금 화려하게 등장한 30대 임원들은 기업에서 어떤 실적을 냈을까.

일단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괜찮은 정도’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최병인 사장은 미국·중국 등 해외시장을 개척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현재는 이지스효성 사장으로 주로 해외 업무에 주력하면서 효성 계열사인 홍진데이타시스템의 대표를 맡고 있다.

고강식 탑경영컨설팅 대표는 “특정 업종이나 직무에서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 대표가 말하는 특정 업종이란 고객이 젊은 층인 통신업체 등이고, 특정 직무란 최신 트렌드 감각이 필요한 마케팅 분야 등을 말한다.

고 대표는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활발해진 것도 기업 임원의 연령대가 낮아진 이유”라며 “기업들은 해외에서 체계적인 마케팅 공부를 한 외국 경영학석사(MBA) 출신의 30대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윤송이 전 상무처럼 씁쓸하게 사라진 이들도 적지 않다. 컨설턴트로 활동하다가 효성그룹에 30대 임원으로 특별 영입된 경험이 있는 한국왓슨와이어트의 김광순 사장은 “전체적으로 볼 때 특별 케이스로 영입된 30대 임원 중 절반 정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자리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성패의 관건은 무엇인가. 누가 뭐래도 일단 실적이다. 실적이 신통치 않으면 옷을 벗어야 한다. 윤 전 상무의 사례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한때 삼성 출신 최연소 LG 사장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양동 전 LG인터넷 사장도 대표적인 경우다.

사장 취임 당시 그가 근무했던 삼성전자가 기술 유출 등을 이유로 LG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화제가 됐었다. 하지만 인터넷 ‘채널아이’를 론칭한 후 3년 동안 3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회사도 LG데이콤에 흡수됐다. 현재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1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피를 발탁했으나 회사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30대에 임원이 된 한 여성 상무는 “계속 앞날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고 기대만큼 성과를 못 내면 남들처럼 그만두는 것 아니겠느냐”며 “(임원이) 빨리 됐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고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호소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로열티다. 대부분 가문이 대주주인 한국 기업의 특성상 오너들은 충성심을 중시하는 성향이 많다. 고위직일수록 실적보다 충성도를 더 따진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것이다. 믿을 수 없다면 제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중용에 한계가 있다.핵심인력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핵심경영진은 되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2002년 30대에 임원으로 대기업에 입성해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한 임원은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여기에 남아 00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 정년을 이 회사에서 맞고 싶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기업의 한 상무는 “황희 정승을 롤 모델(role model)로 여긴다”고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있다. 황희 정승은 세종에게 가장 신임 받는 재상으로 2인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인물이다.

이장희 동서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내에서 ‘뜨내기 임원’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항시 조심하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먼저고, 실적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조직문화 적응이 성공의 열쇠

당사자의 조직 적응력도 큰 몫을 차지한다. 대개 한국의 오너들은 핵심인재를 데려오는 데는 열정을 보이지만 막상 영입한 후에는 ‘내버려두는’ 경향이 많다. ‘알아서 뿌리를 내리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럴 경우 낯선 조직에서 혼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실제로 취재 중에 만난 30대 임원들은 다른 임원 혹은 부하 직원과의 나이 차이, 기업문화 적응 같은 문제가 가장 큰 부담이라고 꼽았다. 많은 30대 임원이 ‘겸손’을 필수 덕목으로 얘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30대에 대기업 임원으로 발탁됐으나 회사와 비전이 달라 그만둔 한 사업가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어려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데 대기업의 경직된 조직문화나 분위기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며 “최연소 상무, 최연소 사장이 된들 오너에 맞춰 움직이는 기업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그만둘 당시 심정을 말했다.

삼성전자의 S급 인재(핵심인재)로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았던 A씨가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외국계 회사로 자리를 옮긴 사례는 조직문화와의 적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장희 교수는 “실적이나 로열티 외에 조직원들과의 관계 같은 ‘미묘한 문제’도 극복해야 30대 임원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30대 임원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대기업에 들어갔다가 다시 ‘고향’인 컨설팅 업체로 성공적으로 컴백했던 김광순 사장은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고 말했다.

“기업체들의 발탁 인사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30대 임원을 발탁한 경우고, 둘째는 연봉은 임원급으로 주면서 직급은 부장, 차장으로 한 경우입니다. 이 중 전자인 30대 임원은 의외로 생존율이 꽤 높아요. 오너나 CEO의 확실한 서포트(지원)를 받는 데다 임원이라는 자리가 고유한 권한을 발휘할 자기만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이런 경우도 성과가 없으면 물러나야죠. 하지만 수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부장, 차장급들입니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자기 파워가 없어 기존의 위계구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럴 경우 연봉을 많이 받는다는 질시를 받는 데다 기존 세력의 견제로 견뎌내기 힘들죠. 제가 알기로 ‘대부분’ 나오고 맙니다.”

봉우리가 높은 산은 골도 깊다. 핵심인재의 삶도 결코 쉽지 않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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