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경제] “투자 확대” 한 목소리 대기업들의 속내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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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26면

“규제를 없애면 당연히 투자가 늘게 돼 있다. 꼭 풀어야 할 규제에 대해 곧 주요 그룹을 대상으로 의견을 모을 계획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위 관계자의 말 속에선 자신감이 물씬 묻어났다. 숨 죽인 채 정부 눈치를 보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대기업 총수들 간의 만남 이후 일어난 극적인 변화다. 회원사에 ‘말발’이 안 서 고민하던 단체가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4대 그룹 총수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당선인은 경제 살리기의 핵심을 ‘기업 투자 활성화’에 두고 있다. 그러자면 재계의 호응이 필수적이다.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이 한껏 고무될 만하다.

그럼 돈을 쥐고 있는 개별 기업의 분위기는 어떨까.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에 기대감을 나타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훨씬 현실적이다.

규제 완화에 대한 관심도 업종이나 규모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규제만 풀면 돈을 풀 건가”라는 질문에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곳도 상당수다. 규제가 투자의 걸림돌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 그룹 임원의 말이다. “사실 인수합병(M&A)만큼 규제가 많은 분야도 없다. 그런데
지난 2~3년간 어땠나. 너나없이 M&A에 달려들었다. 돈이 될 것 같으면 규제가 문제가 아니라 지옥에라도 뛰어드는 게 기업이다.”

누가 독려하지 않아도 기업들이 앞 다퉈 해외 투자에 나서는 것도 그만큼 ‘돈 벌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몇몇 그룹이 발 빠르게 내놓은 투자 계획을 살펴봐도 이런 속사정은 금방 드러난다. 한화 그룹은 지난해보다 투자 규모를 2배 이상 늘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굵직굵직한 건은 거의 해외 M&A다. 그룹 관계자는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와 항공기 부품회사, 중동의 석유화학 공장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대·기아차 그룹도 정몽구 회장이 직접 10조원 넘게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국내 투자분은 일관제철소 건설과 연구개발 등 이미 예정된 게 큰 줄기다. 자동차 공장 신설·증축은 러시아와 미국 조지아주 등 해외에 집중돼 있다. ‘투자 활성화-일자리 창출’이란 신정부의 구상과는 뭔가 핀트가 어긋나 있는 느낌이다. 그럼 기업들이 국내 투자에 주춤거리는 이유는 뭘까. 한 그룹 관계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샌드위치론’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투자 아이템을 못 찾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제 와서 대규모 장치산업이나 제조업을 새로 하자니 중국의 ‘원가경쟁력 벽’이 높고, 첨단 산업에 진출하자니 미국·일본의 ‘기술 벽’이 걸린다.”

사실 정부의 ‘규제 완화’ 약속에 재계가 ‘투자 확대’로 화답하는 모습은 새삼스럽게 보이진 않는다. 양쪽 모두 ‘립 서비스’에 그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녹록지 않은 현실을 기업인 출신인 이 당선인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최근 민간 경제연구소 소장들과의 만남에서 “나도 해 봐서 아는데 수지가 맞지 않는데 억지로 투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정부가 기업의 현실을 반영한 ‘실용적 솔루션’을 제시하고, 기업은 보수적 경영을 탈피해 과감히 신사업에 나서는 모습을 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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