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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부활한 뱀파이어 영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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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16면

요즘 미국에서는 뱀파이어가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에서도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이하 ‘나는…’)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뱀파이어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홀로 싸우는 남자의 ‘전설’을 보여준다.

‘나는…’는 북미 흥행 수익이 1억 달러를 훌쩍 넘어서며 뱀파이어 영화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나는…’를 뱀파이어 영화라고 부르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나는…’는 미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주제인 용서와 구원을 전면에 내세운 재난 영화에 가깝다.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두려움이 아니라, 고립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절망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또한 미국인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배우 윌 스미스가 출연한 전형적인 블록버스터다. 공포영화가 아니라.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이하 ‘써티 데이즈…’)’는 작년 10월 21일 미국에서 개봉해 첫 주에 약 1억6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다.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을 뱀파이어 집단이 습격한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화 제목처럼 무조건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잔인한 뱀파이어들에게서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용기와 힘은 과연 무엇일까? 결론은 언제나처럼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귀결되지만, 만화 같은 액션은 매력적이다. ‘써티 데이즈…’는 공포영화의 단골 메뉴인 뱀파이어를 더욱 자극적으로 다루는 공포영화다.

블록버스터인 ‘나는…’와 공포영화 ‘써티 데이즈…’는 제작비의 규모도 다르고, 뱀파이어를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에서 뱀파이어가 매우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경향은 최근 할리우드에서 한때 마이너 장르로 취급 받았던 영화들이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반지의 제왕’ 이후 판타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표 주자가 되었고, ‘매트릭스’와 ‘엑스맨’의 성공은 수퍼히어로 영화가 단지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이 10대 관객을 사로잡으며 1억 달러를 넘긴 후 공포영화도 주류에 합류하게 됐다. 비수기에 개봉한 공포영화가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판타지, 호러, 수퍼 히어로 물 등 마니아의 전유물이라고 평가된 B급 장르가 상업영화의 최전선을 달리게 된 것은 최근 몇 년간의 일이다. 198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커스가 ‘스타 워즈’ ‘조스’ ‘인디아나 존스’ 등의 블록버스터를 대성공시키며 호러와 SF, 판타지 등 하위 장르를 주류로 끌어올린 적은 있었지만, 당시의 블록버스터는 ‘가족영화’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과격한 표현, 논란이 많은 주제는 피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처럼 각각의 장르가 일정한 지지층을 대상으로 꾸준하게 만들어지는 정도까지는 성장하지 못했다. 20세기 말까지 공포와 판타지, 수퍼 히어로 물 같은 장르는 여전히 소수 마니아만이 즐기는 장르로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형도는 확실하게 바뀌었다. 많은 제작비를 들여 절대 다수의 관객을 공략하고 막대한 이익을 회수한다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소수 열광적인 지지층을 가진 특정 장르의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아진 것이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스파이크 TV에서는 2006년부터 ‘스크림 어워드’를 만들었다. SF, 판타지, 호러, 수퍼 히어로 물 등 마이너 장르로 취급됐던 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주류라고 할 아카데미에서 무시당하는 영화들을 조명하겠다는 의미로 제정한 상이다. 1회에서는 ‘재키 브라운’ ‘킬 빌’ ‘황혼에서 새벽까지’ ‘데스페라도’ ‘데쓰 프루프’ ‘플래닛 테러’ 등 B급 영화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는 영화들을 만들어온 퀜틴 타란티노와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2회는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에게 공로상을 헌정했다. 이들이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는, 아카데미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대중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은 오락물이다. ‘스크림 어워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공포와 판타지 등의 마이너 장르가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써티 데이즈…’ 역시 ‘스크림 어워드’에서 최고의 코믹 부문 상을 받은 작품을 각색한 영화다. 만화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온 ‘씬 시티’ 정도는 아니지만, ‘써티 데이즈…’도 미국 만화 특유의 역동적인 스타일을 재현한다. 뱀파이어 집단이 작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초반의 살육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80년대라면 ‘써티 데이즈…’ 같은 영화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겠지만 지금은 조시 하트넷이라는 스타가 출연하고, 30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들인 꽤 큰 영화가 된다. 게다가 아이들이 보지 않아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관객이 찾는 대중적인 영화다.

21세기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열광적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영화 역시 극장에서 실패해도 DVD 등에서 최소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장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충성도 높은 마니아를 일단 확보하고, 그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영화적 완성도나 이슈로 빅 히트를 기대하는 것이 요즘의 호러·SF·판타지 등 마이너 장르의 전략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수 장르가 천대받고 있지만, 이미 해외에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

감독 프랜시스 로렌스
배우 윌 스미스·알리스 브라가
러닝타임 97분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감독 데이비드 슬레이드
배우 조시 하트넷·멜리사 조지
러닝타임 1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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