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력이 하사한 ‘色의 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호 23면

한국 사회 총천연색은 가장 회색지대에서 시작되었다. 말과 글과 귀와 입이 닫힌 어느 겨울 한복판, ‘칼라’는 군부정권의 대중 순치(馴致) 기재로 전자기계를 통해 밖으로 밀려나왔다. 색에 대한 대중의 묵은 갈증을 권력은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일상의 사회사 <1> 컬러 TV와 VCR

오랜 색 통제는 이를 역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건물·간판·상표·새마을복·교복 따위 무채색 시대에 대한 대중의 권태는 이미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권력의 시혜적 선물로 나타난 컬러는 이윽고 그들의 뜻과 달리 제 길을 갔다. 색을 수용한 대중이 스스로를 거기에 담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과연 색다르게 바뀌어 나갔다. 놀랍게도 권위주의 정권 또한 색의 대중화와 함께 잿빛으로 소멸했다.

그해 겨울, 12월 1일, 퇴근길 사람들은 오종종 소리사나 전파사 앞에 몰려들 서 있었다. 가게 진열장 TV들은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공중파 TV방송의 첫 컬러 송출이었다. 방송과 신문은 이 문화적 사건을 대대적으로 비문화적으로 보도했다. 적어도 그들은 한국인들이 앞으로 색을 어떻게 수용하고 재창조해낼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1980년도를 이른다.

이보다 앞서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신문과 방송과 통신을 ‘자율적’으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64개에 이르던 전국 언론사를 신문 14, 방송 3, 통신사 1개로 통합하고, 그해 여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언론인 1200명을 쫓아냈다. 마침내 이 조치는 12월 1일자로 본격적인 개편체제에 들어갔고, 그 눈속임으로 컬러TV는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애초에 TV는 신줏단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었으니, 대중적 먹잇감으로는 탁월한 맞춤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을 가리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걷혔다. 해방 직후 하지 중장의 군정포고 1호로 통행금지가 발령된 뒤 37년 만의 일이었다. 청계천에서 옮겨간 미아리 텍사스와 천호동 등 신생 집창촌과 술집, 다방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았다. 중고교생 두발과 교복 자유화도 이어졌다. 자율성은 곧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신속하게 대중에게 자유를 하사해 주었다. 그건 이른바 3S(스크린·스포츠·섹스)로 상징되는 소비자유였다.

어쨌든 컬러TV의 위력은 막강해 한국 사회는 광고를 필두로 발 빠르게 색(色) 사회로 변색해 나아갔다. 본격적 소비사회 진입은 컬러시대 시작과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컬러광고는 대중의 소비심리를 가속화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감각적 소비재와 백색가전에서 두드러졌다. 시장의 물성이 대중의 인식을 지배,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TV가 바뀌면서 일상 자체가 급변해 나갔던 것이다.

TV 드라마는 물론 쇼 프로그램에서도 노래 실력보다 얼굴이나 춤이 빼어나 얼른 시청자 눈길을 잡을 수 있는 ‘비디오형’ 연예인들이 인기를 구가했다. 일본 남코사가 개발한 슈팅게임 갤러그(Galaga)가 골목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성장세대의 감각을 전자적으로 장악했다. 어쩌면 그때 벌써 게임강국으로서 한국의 면모를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권 차원에서 프로야구·프로축구·민속씨름·실업배구·실업농구 등을 거국적으로 창설, 중계했다. 얼마 뒤 교육방송 TV과외는 학생들이 VCR을 일상적으로 가까이하게 하는 면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사회적 메시지를 봉쇄당하자 상당수 영상업자들은 변강쇠·옹녀·산딸기·애마부인·젖소부인 따위 에로물을 잽싸게 찍어냈다.

권력은 문화적 배설물 제작을 실질적으로 유도했다. 이 영화들은 극장보다는 집이나 밀폐된 곳에서 보기 적당했다. 더불어 VCR이 공급되었다. 이는 컬러TV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필요하면 개별적으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최초로 색(그림)에 대한 사적 점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오늘날 누구나 제작·소유하고 있는 사적 영상기록물인 웨딩 비디오는 VCR 공급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방과 여관에는 비디오 설치라는 간판을 새로 붙여야 했다. 내용이야 어떻든 영상에 대해 이보다 더 대중적이고 노골적인 관심 표명은 일찍이 없었다. 한국의 성감대 청계천 골목에서 도색잡지는 하루아침에 수입 ‘비데오’로 바뀌어갔다. 비디오 불법복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저작권을 달리 생각할 것도 없었던 게 불법물이 대개 도색물인 점도 크게 작용했다.

달리 말해 도색물이 없었다면 VCR이 그처럼 속도 있게 널리 퍼져 나가지는 않았을 터다. 가부장제 최후의 신경증이라는 포르노 산업은 한국에서 이 무렵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TV가 마침내 빤스를 벗어버린 것이다. VCR이 처음 등장하는 문학작품인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역시 영상재생기는 도색용이자 여자아이를 꼬드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날 이후 배설이 있는 모든 곳에 비디오가 있었다. 그리고 혁명(반독재)을 모의하는 모든 곳에 비디오가 있었다. 사진 권혁재 기자


물질문명이 급속하게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20세기를 일상을 중심으로 되짚어볼 서해성씨는 소설가이자 이주노동자 가족을 위한 문화인권 프로그램 ‘아시아스타트’ 위원장으로 일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