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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자학으로부터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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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몇달 전 김지하 시인이 라디오 대담에서 쏟아낸 독백 아닌 독백이 지금도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정치판에 발 들여 놓으면서 소비했던 정력과 시간을 작품 활동에 바쳤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아쉬워함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아들과의 대화 스타일을 궁금해하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우스갯소리로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박정희 시대부터 가해졌던 탄압에 몸으로 저항하며 투쟁했던 그는 얻은 것도 또 잃은 것도 많지 않았나 생각된다.

총선을 앞두고 김지하 시인의 회한을 떠올리는 것은 인생역정에 대한 그의 짧은 코멘트가 앞다퉈 정치판을 넘보고 있거나 또는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의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문화인으로서 작가 이문열씨가 최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도 국민의 매몰찬 비판에 묻힌 정치판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천작업이 끝난 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갈 그가 김지하와 다른 반응을 보일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름있는 시인과 소설가가 시대상황과 좌표를 달리하면서 직접 겪고 내려다본 정치 이야기에 우리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특정 이념을 떠나 그들의 솔직하고 열정적인 성격, 이상과 실망을 한꺼번에 엿볼 수 있는 기대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나타난 불안과 억압, 갈등과 마찰을 대화와 협동, 투명과 공정.균형으로 대체시켜 나간다면 정말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 수단과 방법 절차를 둘러싸고 꼬리를 물며 나타난 혼란을 우리는 지금 오로지 자학적 의미망으로 꽁꽁 묶어 두고 있다. 그래서 김지하나 이문열이 마음 속에 그리는 꿈을 생각할 수 없고 말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다.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에 지배당하고 자기비하에 익숙해 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거나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다면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오래 전부터 몇몇이 모이면 노기등등해서 '정치인은 모두 도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절반이 도둑'인 것으로 봐주었다.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걸 보니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절반은 도둑이 아니다. ' 차떼기 정당이 들통나고 대통령 주변 인물들도 수사받다 보니 기업인은 거의 범법자화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주체로서 그들이 변모했다. 정치와 자금시장의 투명을 강도높게 요구한다. 물러섰다간 시장에서 쓰러진다.

우리는 전.현직 대통령을 둘러싼 비리 수사를 보고 세상 끝장났다고 본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달리 생각한다. 전직 대통령 여러명을 감옥에 보내고 그들의 아들들까지 가차없이 심판할 수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놀랍다는 반응이다. 국회의 변질과 여야 정당의 무력(無力)이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위기일수록 국민의 수준을 넘는 국회를 가질 수 있다.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자들을 국회로 보낸다면 그들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한국에는 젊고 똑똑하며 패기만만한 실업자들이 많다'(파이낸셜 타임스 보도)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무한한 에너지가 축적돼 있다. 국민이 정치를 바로잡아주고 정치가 그 에너지를 폭발시키도록 유도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우리 자신을 너무 비하하면 꿈도 기력도 없어진다. 이제 자학적 틀에서 우리를 내보냈으면 한다. 제발 꿈을 가질 수 있게.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