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55. 초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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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국 잡지에 실린 ‘초당’의 저자인 강용흘 선생 기사.

이 책은 한인이 쓰고 한국인이 번역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고향 산천을 어찌나 아름답게 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나라 옛 시조도 군데군데 나온다. 시대 배경은 조선 말기. 한 왕조가 쇠락하는 모습과 고향 마을 상황을 애절하면서도 아름답게 쓴 소설이다.

 책 제목은 『초당(草堂·The Grass Roof))』이다.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로 불리는 강용흘(1903~72) 선생이 영어로 쓰고, 김성칠이 한글로 번역했다. 1931년 뉴욕과 런런에서 먼저 나온 이 책을 나는 12세 때인 48년에 읽었다. 내용이 얼마나 초연하고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이 소설을 생각하면 고즈넉한 문장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무작정 읽은 책의 작가가 문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란 것은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60년대 후반 들어나는 이 작가를 만났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만큼 꿈같은 경험이었다.

 강 선생을 만난 것은 존 배를 통해서다. 60년대 후반 뉴욕에서 종종 연주하던 시절 알게 된 조각가 존 배는 24세에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학과장으로 임용된 화제의 인물이다. 그와 그의 부인은 도도한 예술가가 아니라 인심 좋은 한인들이었다.

존 배 부부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 대접하는 걸 좋아했다. 그의 집에서 백남준·김환기 등과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떠들던 순간은 예술사의 한 장면이 됐을 법하다.

 한번은 점심을 먹다 불쑥 질문을 던졌다. 『초당』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읽어 봤느냐고. 그랬더니존 배는 반색하며 “불과 1주일 전에 읽었다.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저자가 뉴욕 근교 롱아일랜드에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재기 넘치는 존 배는 2~3일 만에 강 선생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수십년 동안 가야금 소리도 못 들으셨을 텐데 제가 직접 연주해 들려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강 선생은 흔쾌히 찾아오라고 했다.

 존 배가 운전하고 찾아갔을 때 강 선생은 집 앞 들에서 일하고 있었다. 농부 같은 그의 모습을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1903년생이다. 당시 66세였던 그의 눈빛은 신기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조선 선비 출신인 강 선생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위원까지 역임했다. 두 채의 2층집에는 책이 가득했는데, 그는 셰익스피어 작품과 당시(唐詩)를 줄줄 외웠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영어로 번역하는 중이라고 하기에 당시 문조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내가 그책을 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책은 71년 연세대 출판국에서 나왔다. 이듬해 그의 부고가 신문에 실렸다. 내 영감의 원천이었던 분이 별세한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한동안 마음이 허전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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