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생각하며>12.朴正熙모시기 10년 金正濂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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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사람에 따라서는 그 말을 그냥 듣고 옮기는 것이 무의미한 사람도 있다.지위나 역할을 떼어놓고는 그 사람의 생각 또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주 어려운 사람 말이다.
김정렴(金正濂)씨도 분명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뿐만 아니다.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 분의 말을 생각하려면 지위나 역할만 고려하는데 그쳐서도 안되고 역사마저 다소라도 정리하는데까지 미쳐야한다고 판단했다.
역사,이것은 어려운 분야다.더구나 박정희(朴正熙)시대의 역사는 그 체온이 아직 식기도 전이다.
김정렴씨는 69년부터 9년3개월동안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지냈다.79년 10.26 궁정동 사건이 나기 꼭 열달전인 78년12월27일 그는 청와대를 떠났다.9년3개월이란 기간은 박정희 집권 18년6개월의 꼭 절반이기도 하다.그 이전 62년부터69년까지는 재무차관.상공차관.재무장관 상공장관을 두루 거쳤다. 그에게 인생관을 물었다.그는 72세의 노인으로서는 너무나 정확하게 대답의 단초를 잡는다.1945년8월6일 오전8시15분,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터졌을 때가 그의 인생관이 확립된 시점이다. 그 순간 그는 폭심(爆心)에서 겨우 2㎞ 떨어진 히로시마城 근처 연병장에서 일본군 견습사관으로 훈련집합 중이었다.
사실 2㎞라면 원자탄의 경우는 폭심에 다름이 없다.지금부터 50년전의 일이다.
『제 등과 손은 살이 타서 날아가 버렸고 남은 살은 덜렁덜렁달려 있었습니다.불꽃으로 된 회오리바람이 여기저기 날아 다니고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저는 그 연병장에 있던 2백50명 견습사관가운데 제가 소속한 오카야마 연대에서 온 50명에 대해 선임자로서 인솔책임이 있었습니다.그 가운데 반은 이리 저리 다니며 찾아내 입원시켰는데 나머지 반은 파악이 되지 않 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소로 다시 갔어요.눈을 다쳐 볼수가 없게 된 히데히라(日出平)를 찾아냈습니다.이 자는「근처의 병원에는 가 봐야 치료도 받을수 없을테니 네가 오카야마에 있는 우리 연대로 돌아갈것 아니냐.그렇다면 나도 같이 데려가다 오.」이렇게떼를 썼습니다.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는 그를 부축해 걸어서 오카야마市로 돌아왔습니다.』 자대(自隊)로 돌아온 그들은 오카야마에 있는 육군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라고는 소독 가제를 하루 두번씩 갈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의사와 간호사들도 대부분 달아나고 없었다.식사는 보리가 많이 섞인 죽이었다.8월15일로 소급,소위로 임 관시켜 주었다.「포츠담 소위」라고 사람들은 불렀다.고등관 8등급에 해당하는 퇴직금 2천몇백원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연락선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그냥 병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어요.그 다음엔 머리가 빠졌습니다.그러더니 피부에 반점이 생기면서 그 반점 부분에서 피부 출혈이 시작되었어요.원자병이지요.계속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열은 늘 38도에서 내려갈 줄 몰랐습니다.거 기에 서 더 진전돼 각혈.사혈을 하고 열이 40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생명의 끝장이라는 것은 주위에서 늘 보는 터였습니다.그럴 즈음어느날 히데히라의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물어 물어 병원으로 아들을 찾아왔습니다.히데히라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 긴바라(金原:김정렴씨의 일본식 創氏姓)소위가 애써 자기를 찾아내 불구덩이속에서 꺼내 부축해 여기까지 데려와 주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틀림없이 거기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디다.』 이렇게 되어 생명의은인이라며 그들 부자가 하도 간곡히 청하는 바람에 김정렴씨는 주고쿠(中國)산맥 속에 있는 히데히라의 시골집으로 갔다.히데히라네는 닭 3천마리를 기르는 양계농가였다.거기서 김정렴씨는 11월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충분한 영양.휴식.치료를 받았다.
특히 한 일본인 의사가 날마다 왕진을 와 환자 자신의 피를 뽑아 혈청을 만들어 그 혈청을 다시 환자에게 주사하는 치료를 해주었다. 『어느날 아침 히데히라의 부친이「너희들은 이제 살았다」고 큰 소리로 말하며 미닫이를 열고 마이니치와 아사히 두 신문을 보여주는 거예요.두 신문 모두 1면부터 사회면 끝까지 도쿄대 의학부 쓰즈키(都築)박사팀의 원자병 치료보고서로 가득 차있었습니다.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받고 있던 치료가 가장 좋은것이라고 강력히 권고한 글이었습니다.원자병은 척수의 조혈기능을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양을 충분히 취하고 자기혈청요법을 써야한다는 것이었어요.저는 히데히라가 아니 었으면 아마 죽었을 겁니다.일본인도 배급이 거의 떨어져 굶는 판에 어디 가서 하루다섯끼의 닭고기와 계란이 든 쌀죽에다 비타민 알약.과일등을 풍족하게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내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에서 히데히라를 구한 것이 결국은 나 자신을 구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그때는 어머니가 애기를 데리고 가는 것을 빼고는 모두 뿔뿔이 혼자 살려고 도망가는게 현실이었지요.』 이것이 인생관을 말해달라는 나의 요망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아무리 강한 반일(反日)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스물두살난 식민지 출신 일본군 견습사관의 극단적 책임감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원자탄의 폭심 속에서 완성을 본『인간이란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직분을 다하는 존재다』라는 그의 확고한 생각은 1953년 동란중에 실시된 제1차 화폐개혁때로 연장돼 다시 한번 중책을 완수하는 원천이 된다.
그는 30세된 한국은행 직원으로서 이 통화개혁의 입안.계획.
실시에 이르는 전과정을 물샐 틈 없이 비밀을 지키는 속에서 책임지고 무사히 완수했다.
『제가 5.16후인 1962년 재무부차관으로 다시 정부에 들어간 것도 62년6월 실시된 제2차 통화개혁의 책임을 맡게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화폐개혁 책임져 당시 군사정부는 응분의 치밀한 프로그램을 짜놓지도 않은 채 통화개혁을 추진해오다가 막상 신권(新券)인쇄주문까지 영국에 끝내 놓은 단계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적격자를 찾다가 김정렴씨가 떠오른 것이었다.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박정희씨가 한국은행 총재이던 유창순(劉彰順)씨에게그를 정부로 파견해주도록 요청했다.나와 대담하는 사이에 박정희대통령을 그는 어김없이『각하』라고 호칭한다.
지나간 시간을 시세에 따라 바꾸어 말할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인가 보다.말하자면「한번 각하는 영원히 각하」인 해병대같은 사람일까.
『전 각료가 일괄 사표를 냈어요.저는 그때 상공장관직에 만 2년이 되었고 명예제대다 싶어 아주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있는데 각하가 나를 청와대로 부른다는 연락이 왔습니다.비서실장으로발령내겠다는 말을 듣고는 「각하,저는 경제나 조금 알지 정치나국방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그랬더니「장관,정치가 뭐냐.경제가 잘 되면 그게 정치지,공화당이니 뭐니 정치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아니야」하시면서 자기는 앞으로 국방과 외교에 너무 바빠 시간이 없다면서 인사를 비롯한 비서실 전권을 저한테 주었어요.』 김정렴씨에게 재차 물어본 결과 박정희씨는 그때부터 대통령으로서의 시간과 정력 대부분을 국방과 외교에 쏟았다는 것이다.바로 이 국방 강화를 일러 反박정희 진영은 분단 영구화라고 공격한다.그의 경제개발 중시와 정치 도외시는 개발독재라 는 말로 합성된다.
과거는 공(功)과 과(過),이 두 차별되는 우열 점수에 의해평가할 수 있다.현재는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 이 두대결하는 힘의 한쪽에 서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작용과 반작용은 크기는 똑같고 방향은 정반대인 두 힘 이다.
남북 분단은 작용과 반작용이다.그 어떤 쪽을 편든다는 것은 뉴턴의 법칙을 범하는 인간적 처지일 뿐이다.게다가 박정희는 이미 현재가 아니다.
박정희 시절은 이젠 공.과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여기에는 다시 2개의 기준이 있다.하나는 박정희가 남한에 남긴 유산을 김일성(金日成)이 북한에 남긴 유산과 비교하는 것,또 하나는 박정희 시절의 남한을 현재의 남한과 비교하는 것이다 .
박정희 시절의 남한은 그때는 벗어나고 싶었고 지금은 돌아가고싶지 않은 어렵고 괴롭던 과거이긴 하지만 현재의 남한을 만든 성공적 과정이었다.특히 김일성이 남긴 북한과 비교하면 두드러지게 성공적 과제다.
전우(戰友) 히데히라를 원자탄 폭발 속에서 구해낸 것을 어떤반일사상가도 꾸지람하기 어렵듯이「개발독재와 분단 영구화 획책」이란 환경속에서 한국의 경제개발에 크게 기여한 김정렴씨를 꾸짖을 수 있는 反박정희주의자는 드물 것이다.
***꾸짖을자 누군가 김정렴씨는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그가 쓴『한국 경제정책 30년사-김정렴 회고록』은 보기 드물게 치밀하고 객관적인 역사기록이라는 점,그리고 우리보다 후발 개발도상국을 위한「정부개입이있는 경 제개발 정책」의 생생한 체험적 교과서라는 점, 이 두가지에서 빼어난다.이 책은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되었다.최근에는 세계은행이 영어로 출판했다.세계은행은 전통적으로 경제개발에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던 기관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김정렴 회고록』에는 김정렴씨와 상호 생명의 은인간인 히데히라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나온다.그러다가 최근히로시마에 있는「주고쿠」신문의 매개로 그가 그 후 다른 집안에양자로 가 성은 바뀌었으나 살아 있음이 밝혀졌다 .오하시(大橋)가 된 그때의 히데히라는 지금은 중학교 체육교사를 정년 퇴임한 노인이다.
「원자탄 폭심에서 살아나온」이 두 사나이는 그때로부터 50년만인 올 봄의 첫 재회를 짜고 있다.50년이 지났건만 김정렴씨의 손에는 그때 원자탄의 열에 입었던 화상 흔적이 아직도 두껍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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