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51. 실패한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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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라티프.

1960년대 말 미국 뉴욕 인근. 당시 30대이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동양인은 물론 백인도 찾아볼 수 없는 흑인 마을이었다.

인종차별을 할 생각은 없지만 외국에 나갈 기회도 몇 번 없었던 한국인으로서 흑인만 모여 사는 이곳에선 괜스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만난 흑인 친구 집으로 들어섰다. 이웃은 물론 그의 아내·아들·딸 할 것 없이 모두 흑인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는 주스를 한 잔 내왔다. 하고많은 주스 중에 하필이면 검푸른색을 띤 자두 주스였다.

 그 친구는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 유세프 라티프(본명 윌리엄 에마뉘엘 허들스턴)였다. 내가 그를 뉴욕으로 불쑥 찾아간 것은 연주자로서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87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뉴에이지 앨범상까지 받은 인물이다. 안 해본 사업이 없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대학을 졸업한 나는 사업을 많이 벌인 편이다.

그중에서 실패한 사업이 바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한국에 들렀던 미국 작곡가 도널드 서로부터 이연식이라는 기술자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도널드 서가 한국 전통 타악기·생활용품 29개로 연주한 ‘홍진만장’이라는 곡을 만들면서 그를 만났던 모양이다. 엿장수 가위까지 등장하는 곡이었으니 한국에서 악기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다 모였을 터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관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이연식은 못 만드는 악기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나는 이연식에게 서울 명동에 작은 공방을 마련해 주고 “앞으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를 만들면 내가 각지로 판로를 개척해 팔아보겠다”고 말했다. 일류 연주자는 손으로 만든 마우스피스를, 그것도 아주 비싼 가격에 사서 쓴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구멍가게만 한 공방에 온갖 재료를 다 갖다 뒀다.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내 고등학교 때 친구 안동국에게 연락했다. 서울대 미대를 나와 뉴욕에서 그림은 물론 음악·스포츠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였기에 인맥이 넓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세프 라티프라는 사람이 재즈 분야에서 굉장히 성공한 데다 동양음악에 관심까지 많으니 가야금을 하는 너를 좋아할 듯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라티프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그날 바로 자기 집에 나를 초청했다. 그 집에서 내가 갖고 온 마우스피스를 보여줬더니 즉석에서 사용해 보더니 “아주 좋다”며 추천장까지 써주었다. 그러나 칭찬을 늘어놓은 그도 그걸 사지는 않았고, 미국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내 꿈은 깨졌다.

결국 우리가 만든 마우스피스는 국내에서만 약간 팔렸을 뿐 해외에서는 한 개도 안 팔렸다. 내 꿈은 완전히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장사라는 게 이처럼 쉽지가 않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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