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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만 가는 '한국판 장발장'들…생계형 범죄 급증

중앙일보

입력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발장'.

장발장은 굶어 죽어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19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감옥에 가게 된 장발장은 수차례 탈옥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19년만에 가석방된다.

비단 장발장과 같은 일들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진 않다. 최근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경기 침체로 한국판 장발장과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자살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생활비를 이유로 한 생계형 범죄는 2002년 4만852건, 2003년 4만2100건이었으나 2004년에는 5만4856건, 2005년에는 4만9708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개인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는 상황이지만 더 팍팍해진 생활고에 절망하는 서민들이 늘어나는 우리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배가 고파서…"

두부 배달원인 황모씨(29)는 임신 중인 아내와 세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아내와 아들 모두 두부를 좋아했지만 빠듯한 월급으로 이조차 마음껏 사 먹일 수 없어 황씨는 가족들에게 언제나 미안함 마음이 가득했다.

미안함을 참지 못한 황씨는 결국 매장에 진열된 두부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0여차례에 걸친 '두부 절도'는 지난달 7일 오후 8시께 서울 동작구 A할인마트에서 두부를 훔치다 범행 장면이 CCTV에 잡히면서 덜미가 잡혔다.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황씨는 "나쁜 짓인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가급적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은 것만 훔쳤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먹고 싶은 부대찌개 재료를 마련하게 위해 자전거를 훔친 40대도 있었다.

지난 3월7일께 서울 지하철 장한평역 앞에서 강모씨(42)가 자전거 3대를 훔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강씨가 훔친 자전거는 고물상에 팔아도 채 1만원이 안 되는 고물 자전거였다.

강씨는 지난 2000년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5년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고, 그동안 부인은 집을 나갔다. 결국 기초 생활 지원비 60만원과 고철을 주워 팔아 버는 수입만으로는 두 아이를 키우기가 버거웠던 것.

강씨는 "아이들에게 끓여줄 부대찌개 재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낡은 자전거를 훔쳤다"며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게 많은데 단 돈 1000원이 없어서 사 주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직장을 퇴사한 뒤 생활비가 떨어져 대형마트에서 옷가지와 먹을 것을 훔치거나, 아기 분유값을 마련하기 위해 20대 부부가 빈집을 터는 등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범죄들도 잇따르고 있다.

◇돈 되는 건 뭐든지 훔쳐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승용차 바퀴·소방호스 노즐·등산로 펜스까지 홈쳐가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소위 돈으로 교환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생계형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송모씨(46) 부부는 쪼들리는 생활을 견디다 못해 4월16일 오후 8시20분께 전남 무안군 일로읍 농공단지 내에서 시가 750만원 상당의 지하수 시추 파이프 50개를 훔쳤다. 송씨는 경찰 조사에서 "어려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이같은 일을 벌이게 됐다"고 힘없이 말했다.

또 지난 5월22일 오후 대구 북구 침산동 침산공원.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쉼터인 이곳 입구에 설치돼 있던 약 15m 길이의 스테인리스 펜스가 기둥 부분이 날카롭게 잘린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 도구를 이용해 50m 높이에 설치된 수십㎏이 넘는 펜스를 잘라 간 것이다. 이는 최근 스테인리스 값이 ㎏당 2~3배나 올랐고, 용도가 다양해 단가가 높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공원 화장실의 변기 뚜껑, 전구, 출입구 손잡이나 하수구 뚜껑을 훔쳐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등산로 펜스를 도난당한 것은 처음"이라며 혀를 찼다.

한편 4월15일께 새벽에는 순천시 풍덕동과 남정동 일대 주택가 이면도로에서는 주차돼 있던 승용차 3대의 앞뒤 바퀴를 모두 빼가는 황당한 절도사건도 있었으며 광주지역 아파트 단지에서는 같은 달 14일부터 4일 동안 옥내 소화전 구리노즐 1300여개가 잇따라 사라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전문가들은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로 최근 절대적 빈곤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인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이 커진 것이 큰 원인이라고 의견을 나타냈다.

경찰대학교 표창원 교수는 "전반적으로 사회복지수준이 높아져 저소득층도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어 생계형 범죄가 굶주림에 의한 범죄라기 보기는 어렵다"며 "개인이 느끼는 지나친 상대적 빈곤감의 증가로 이러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생계형 범죄는 먹고 살 수 없어서 선택하는 범죄 행위라기보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며 "맨홀 뚜껑이나 건축현장의 자재를 훔치는 것은 생계형 범죄로 정의하기 보다는 파렴치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생계형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가치관 재정립과 법집행의 확실성 회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표 교수는 "사회적인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복지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기본적 가치관을 성립할 필요가 있다"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복지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반적으로 이런 범죄의 경우, 설마 적발될까 하는 안이한 생각들을 많이 한다"며 "법질서의 확실성을 회복해 작은 일이라도 확실하게 처벌해야 생계형 범죄 행위를 쉽게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생계형 범죄는 생활능력이 없다보니 범죄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1~2만원도 절실하기 때문에 범죄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며 "이들의 고용문제나 복지를 위해 우리사회 전제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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