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 서울서 교수 생활 4개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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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올 8월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67)가 한국에 왔다. 2001년부터 이미 네 차례나 한국을 찾았던 그였기에 방한 자체는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한데 이번엔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서 온 것이라 했다. 그는 올 2학기 이화여대에서 강의 두 개를 진행했다. 궁금했다. ‘프랑스 문학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세계적 문호가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왜 그리 자주 찾는지. 이번엔 아예 눌러앉아 강의를 맡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인지. 한국에서의 첫 강의를 끝낸 단독으로 만나 서울 생활 얘기를 들었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에서도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젊었다. 190㎝는 족히 넘을 듯한 키에 꼿꼿한 자세, 짧게 친 금발과 캐주얼 셔츠 차림의 그는 칠순을 지척에 둔 노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을 자주 찾는 이유가 궁금하다.

 “안정적이다 못해 침체한 분위기인 유럽에 비하면 한국 사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다이내믹하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심이 혼재돼 있다. 그 속의 한국문학 역시 아주 다채롭다. 그런 매력 때문에 한국을 좋아하게 됐고, 한국에서 강의를 맡을 결심까지 하게 됐다.”

 -당신은 한국뿐 아니라 일생동안 미국·영국·프랑스·나이지리아·멕시코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내 조국은 없다.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다”라는 말도 자주 했는데.

 “아마도 내가 ‘역마살 낀 용띠’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주팔자를 본 적은 없는데 이참에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웃음).”

 -서울에는 혼자 왔나. 어디서 지냈나.

“아내와 두 딸은 파리에 두고왔다. 이화여대 국제기숙사에서 혼자 머물렀다.”

 -한국에서의 4개월은 어땠나.

 “정 많고 예의바른 한국사람들 덕분에 매순간 행복했다. 학교 후문에 있는 ‘엄마손식당’의 알밥을 좋아해 자주 먹는다. 설렁탕도 좋아한다. 추운 날엔 길거리에 파는 붕어빵이 특히 맛있다. 한국어 읽는 법도 배웠다.” (그는 한국어 실력을 굳이 증명하겠다며 기자의 명함에 인쇄된 ‘중앙일보’ 네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 보였다)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저녁에 소주를 즐겨 마셔야 완전한 한국인이 된다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한국인이 덜 된 것 같다.”

 -한국 학생들이 어떻던가.

 “한국 학생들은 적극적이고 똘똘하다. 미국에서 나는 학점에 그리 후한 교수가 아니었는데, 한국 학생들은 워낙 훌륭해 모두 좋은 점수를 줄 생각이다. 학기가 끝나는 주말에 클래스 전체 학생들과 삼청동 매듭박물관에 놀러가기로 약속했다.”(그는 2002년까지 10년 넘게 미국의 뉴멕시코 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다. 한국에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1학년 ‘불어토론’과목과 ‘프랑스 현대 문학’학부 과목을 강의했다.)

 - 한국 문학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들었다.

 “최근 발표된 작품 중에 한국 사회의 문제를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는 수작이 많다. 특히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가 인상적이었다. 한강의 작품도 좋다.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38선과 한국전쟁 같은 이데올로기적이고 경직된 이미지다. 그런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남한은 독자적으로 정말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윤동주의 시는 최고다.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처음 한국 방문 때부터 인연을 맺은 황석영의 작품도 좋다. 최근작 『바리데기』는 그 자체로 훌륭할 뿐 아니라 젊은층에 크게 어필했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대와 교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 당신은 첫 작품 『조서』로 공쿠르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르노도(Renaudot)상을 수상했다. 20대 초반에 화려하게 데뷔한 뒤 작품을 낼 때마다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선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데.

 “프랑스 속담에 ‘버터를 가지기 전에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영광이 주어진다면 마다할 리 없겠지만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는다.”

 -노벨문학상 발표날인 10월 11일 당신 집앞에 한국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

 "(박장대소하며)전혀 몰랐다. 그날 많은 기자들이 최미경 교수에게 전화해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작 나는 그때 지하철 안에 있었다.”

 -앞으로 계획은.

 “한국에서의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한 학기 일정으로 왔지만 계획을 바꿔 내년에도 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방학 동안 미국·중국·스웨덴에서 출판 관련 행사를 마치고 2월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을 다음 학기 마칠 때쯤 완성할 생각이다. 파리에서보다 서울에서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22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르 클레지오는

본명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00E9>zio). 1940년 프랑스 남부 니스 출생. 아프리카 모리셔스 섬 태생인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삭의 어머니가 남편을 떠나 니스에 머무는 사이에 그를 낳았다. 해서 그는 현재 이중국적자(프랑스·모리셔스 공화국)다. 여덟 살 되던 해 나이지리아로 건너가 영국 군의관인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보낸 유년기를 “고통스러울 만큼 강렬한 자유이자 끊임없이 돌아가고 싶은 추억”이라고 회상한다. 니스 대학을 거쳐 60년 영국 브리스톨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63년에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Renaudot)상을 받았다. 물질문명에 희생되는 왜소한 인간군상을 다룬 『조서』는 프랑스 드골 정부에 대항한 알제리의 독립 전쟁을 모티브로 했다. 이후 『열병』『홍수』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프랑스 문단의 거장으로 우뚝 선다.

66년 프랑스군에 입대한 그는 2년간 방콕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이때 접한 불교문화는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70년대 초반부터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특히 멕시코에서 만난 남미 인디언의 삶에 매료돼 인디언 신화를 번역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80년 발표한 『사막』은 프랑스 학사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주는 문학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2001년 대산문화재단 초청으로 한국에 처음 방문한 그는 전남 화순 운주사의 풍광을 담아 ‘운주사 가을 비’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2003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자전적 소설『혁명』은 출간 직후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자유’라는 가치는 그리스 시민이 아닌 노예들에게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고 즐겨 말하는 그는, 작품을 통해 기독교 문명에 바탕한 서구적 틀을 벗어던지고 자연과 하나 되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왔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작가’로 일컬어진다. 대표작으로 『섬』『사막』『아프리카인』『어린 여행자 몽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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