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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국문화지도 <8> 영화 3. 포스트 천안문 세대와 독립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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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07년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한 왕취안안 감독의 ‘투야의 결혼’.

 중국영화라면 장이머우, 천카이거가 전부라고? 그건 중국영화의 한 면만 보고 하는 얘기다. 박스오피스로만 따지면 ‘다피엔(대작)’위주 시장에서 맥을 못추지만, 눈여겨봐야 할 영화들이 있다. 최근 수년간 해외영화제에서 이름을 날리며 중국영화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독립예술영화들이다. 선배 5세대 감독들이 절대 권력을 구가하며 전통·무협에 빠져있을 때, 이들은 정부의 검열에 맞서며 중국 사회의 현실과 모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스틸라이프’로 200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자장커, ‘북경자전거’‘상하이드림’으로 주목받은 왕샤오솨이, 천안문 사태를 다룬 ‘여름 궁전’으로 중국 내 상영·제작금지 처분을 받은 러우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도권 밖에서 작업하는 ‘지하전영(地下電映)’ 혹은 5세대에 맞서는 6세대 감독으로 불렸다. 이후 상당수가 지상으로 올라왔고 최근에는 ‘포스트 천안문 세대’ 혹은 ‘신생대(新生代)’라고 불린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영화계에 진출해 새로운 어법을 선보이는 신진 세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 5세대를 넘어

 천안문 사태 이후 베이징영화학교(북경전영학원)를 졸업하고 현장에 진출한 이들의 환경은 선배들과 달랐다. 대학을 졸업하면 국가가 지역 제편창(영화제작소)에 알아서 배치해주던 과거와 달리, 스스로 창작의 길을 찾아야 했다. 또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재하는 극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중국사회의 변화와 모순, 현실 자체가 창작의 동력이 됐다”고 퀴어영화감독 추이쯔언은 말한다.

 5세대 영화속 향토적 공간은 이제 대도시로 바뀌었다. 서구사회를 매료시킨 전통미학, 은유와 상징 대신에 서민생활, 당대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등장했다. 자장커의 ‘소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그 존재 자체가 저항적인 소매치기를 주인공으로 했다. 왕샤오솨이의 ‘북경자전거’는 청년세대의 출구 없는 삶에 대한 초상이다. 러우예는 과감한 성적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장커, 왕샤오솨이 등은 해외에서 주목받으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차기작으로 갱스터영화 ‘쌍웅회’를 준비 중인 자장커는 중국 독립영화계의 살아있는 신화다.

# 무너지는 언더와 오버의 경계

 추이쯔언은 “2002년을 기점으로 검열이 완화됐다. 디지털 미디어의 보급으로 양적으로 팽창한 지하·독립영화를 정부가 일일이 검열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검열이 극장 상영 필름영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디지털 영화는 아예 검열망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소재나 스타일의 다양화도 눈에 띈다. 중국 독립영화계의 대부인 장셴민 베이징영화학교 교수는 “노골적인 정치영화는 거의 없다. 다양한 소재에 대해 예술적 밀도를 더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고발한 ‘끝없는 밤’의 판지안린은 “아예 검열을 무시하고 작업한다”고 말한다. “정치문제, 선정적 표현, 폭력, 소수민족 문화, 사회와 당의 어두운 면을 검열로 규제하는데 이걸 빼면 만들 영화가 없다. 올 부산영화제 때는 정부 허가 없이 참가했으나 별 문제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정부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올 초 45세 이하 감독 16명에 제작비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루추안, 자장커, 닝하오, 쉬징레이, 장양, 왕샤오솨이 등에게 영화마다 시나리오 개발과 제작지원비 50만 위안(620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생색내기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장셴민 교수는 “대부분 자체 펀딩이 가능한 감독들로 정부 태도에 근본적 변화는 없다”고 지적했다.

# 어려운 예술영화의 길

 장셴민 교수는 “냉소적인 사람들은 중국에는 독립영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 볼 수 없으니까”라고 전한다. 실제 지난해 중국 영화 제작편수는 330편이지만 극장 개봉작은 20여 편에 그쳤다. 그것도 상업 대작과 주선율(사회주의적 윤리의식 등을 고취하는 영화)이다. 나머지 3분의2는 극장에 걸리지 못한 채 ‘다오반’이라 불리는 불법 DVD나 해외 판매, 방송 등으로 유통된다.

 막상 극장에 걸려도 상황은 참혹하다. 2006년 흥행순위 5위까지의 영화가 전체 흥행수입의 45%를 차지하는 등 과점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스틸 라이프’나 2006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수상작인 ‘럭셔리 카’(왕차오 감독) 같은 영화도 박스오피스의 1%가 채 안 되는 실정이다.

 제작비는 대부분 해외영화제 기금으로 충당된다. 부산영화제를 통해 발굴되고 이어 서구 3대 영화제에 나가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통로가 구축된 것이다. 배급 문제 개선을 위해 올 초 중국 정부는 예술영화전문원선(배급망) 건립 계획을 밝혔으나 아직 구체적 성과는 없다.

# 포스트 천안문 세대의 디지털 빅뱅

 5세대가 문화혁명이라는 트라우마를 겪었다면, 새로운 세대에게는 천안문 사태가 공통 경험이다. 왕차오는 “천안문 이후 비로소 영화인들이 사회 현실에 대해 직접 발언하기 시작했다. 천안문은 5세대에게는 확실한 변절, 6세대에게는 보다 현실비판적인 영화를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말한다.

 장셴민 교수는 99년 이후 벌어지고 있는 ‘청년영상운동’에 특히 주목한다. “중국사회의 변화가 계층을 분화시켰고 동시에 사회적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디비캠을 들고 자기 영화를 찍는 청년 세대가 출연했다. 이들의 독립영화는 단지 영화계를 넘어 중국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가져오고 있다.”

 포스트 천안문 영화는 동시에 반유토피아적인 저예산 디지털영화로 상징되는 기존 독립예술영화의 지형도 넓혀가고 있다. 다양한 영상물의 세례 속에 자라난 영상세대들이 새로운 영화적 감성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CF 감독 출신으로 MTV적 영상의 저예산 장르영화 ‘크레이지 스톤’으로 일대 돌풍을 일으킨 닝하오를 비롯한 영상 키드들은 중국 영화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고 있다.

◆‘다오반’의 역설=‘다오반(盜版)’은 불법 DVD를 일컫는 말이다. 정부의 형식적인 규제에, ‘정반(正版·정품)’을 만드는 업체가 동시에 다오반을 찍어내는 경우도 있어 천문학적 시장규모를 과시한다. 정반의 15~20% 가격에 콘텐트가 매우 다양하다. 상업영화는 물론이고 희귀·고전영화, 전 세계 곳곳의 독립·예술·실험 영화들까지 속속 출시된다. 세계적 영상 라이브러리가 따로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국내에는 출시되지 않은 김기덕 감독 12편 전작 세트도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다양한 다오반들이 젊은 영화학도에게 일종의 영화교과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베이징=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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