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같은 현실 "썰렁이 시리즈" 최고 유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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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망년회 1차,오랜만에 만난 동창녀석이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을 아주 재미있는 것인양 떠들어댄다.
망년회 2차,한 녀석이 최신 유행곡을 뽑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마이크를 잡는다.
웬 걸 가요반주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80년대 발라드.
3차를 갈까 말까 하는데 이게 얼마만이냐며 오늘은 마실 때까지 마셔보자고 꼬드긴다.술집 한 구석에서 졸다가 깨보니 열심히꼬드기던 그 녀석은 벌써 집에 갔단다.
자,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데 딱 떨어지는 한마디가 있다.바로『썰렁하다』.신세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낸다.
말은 시대를,사회를 반영하고 젊은 세대는 그들의 선배가 경험한 것과 다른 사회를 다른 감각으로 살아나가기 때문이다.
올해 최고의 유행어는 무엇이었을까.작년 이맘때 등장하기 시작한「썰렁이 시리즈」는 추운 겨울이 돌아오자 다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썰렁이 시리즈」의 특징은 말없이 동작만으로도 의미를 표현할수 있다는 점.양손을 좌우로 저으며 스키 타는 동작을 흉내내면겨울올림픽이 열렸던 도시「릴레함메르」.두 손바닥을 겹쳐 세우고엄지손가락만 옆으로 까딱거리면 추운 남극에 사는 동물 「펭귄」. 텔레비전 광고가 유행을 낳는 시대답게 광고문안에서 따온 것도 많다.앞에 보이지 않는 얼음덩어리가 놓여있다고 가정,껴안는동작을 취하는 것은 윗옷을 벗은 모델이 등장했던 맥주광고를 흉내낸 것이다.
광고문안도 종종 인용된다.「3면 입체 냉각」이나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네」가 그 예다.「추워탕」이나 「썰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름에서 따온 경우다.
『썰렁하다』는 말은 듣는 당사자로서는 당연히 반갑잖은 부정적표현이다.
적극적인 부정이나 비판보다는 냉소적인 구석이 있는 게「썰렁이시리즈」의 특징이다.MBC-TV 『웃으면 복이 와요』에 나왔던「썰렁이 3형제」(나경훈.김학도.오승환)나 KBS-2TV 『폭소대작전』「날아라 비행소녀」코너에 나오는 「아 이스맨」(이덕재)은 이런 말의 유행에 가장 민감한 개그맨들이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처럼 슬픈 것도 없지만 코미디가 꼭 웃길 거란 보장은 없다.「썰렁이 3형제」는 코미디가 우습지 않은 「썰렁한」상황이면 등장,한차례 스키 타는 동작을 하며 지나가곤 했다.「아이스맨」은 아예 웃기지 않는 게 목표다.
흰색 옷에 눈가루를 뿌리며 등장,『감은 감인데 못먹는 감은?-답:영감』식의 고전적 이야기를 늘어놓는다.아이스맨은 자신의 개그에 아무도 웃지 않으면『성공했다!』며 깡충거리고 기뻐한다.
비슷하게「썰렁한」이야기가 종종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다.
『토끼와 달팽이가 경주를 했다,달팽이가 이겼다,왜 그랬을까?-답:무지 빠른 달팽이였다』『이웃집이 날마다 싸움을 벌여서 너무 시끄러웠다,그 옆집이 어떻게 했을까?-답:그냥 이사갔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보다 더 「썰렁한」건 코미디같은 현실이다.
등교길에 한강다리가 끊어지고,택시기사가 강도로 돌변하고,세금이도둑질당하고,가스폭발로 동네가 잿더미 되는 황당한 일이 올해 사회면을 가득 메웠다.내년에는 어떤 절묘한 표현 이 등장할까.
아무쪼록「썰렁한」사건은 이제 그만.
〈李后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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