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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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32) 잠시발걸음을 멈추고 화순은 치솟은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몇 집…아픈 사람이라도 있는 듯이 불이 켜져 있을 뿐,일본인들의 숙소는캄캄했다.
문득 길남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만난다.우린 다시 만나는 거다.』 어떻게? 아무 것도믿지 못하면서.그러나 그때 화순은 물었었다.그날이 온다면 무엇인들 못 견디랴.
『너 이렇게 살아야 한다.네가 살아남을 길은 오직 하나야.많은 걸 미워해라.분노가 있어야 산다.차마 눈을 못 감게 미워해야 할 게 많아야 한다.그러면 우린 다시 만난다.』 『네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그렇게 있으라는 그런 말이구나.』 『그래,그거다.그러자면 많은 걸 미워해야 한다.그것도 목숨 부지하는 길이라는 걸 난 이 섬에 와서야 알았다.』 『미워하며,세상을 미워하며…살아질까? 이제까지도 그렇게 살았는데….』 『더,더 해야 한다.세상 저 끝까지도 다 미운 거로 가득차야 한다.그래야 산다.독하게 마음 먹어라.』 그렇게 말하며 길남은 왈칵 화순의 몸을 안았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아주 편안한 마음이 되어 그때 화순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많은 걸 미워하라는 이 남자.그래야 살아남는다는 이 남자.그날이 언제일지 모르는데,서로 만나는 그때까지 세상을 할퀴며 살라는 이 남자.
괜찮아.나 많은 거 겪은 여자야.새로 더 겪을 것도,새로 더미워할 것도 남은 게 없는 여자야.마음속으로 그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였다.
밀치듯 화순의 어깨를 밀어내며 길남이 말했다.
『나 간다.』 그리고…남았다.덜컹 덜컹 뛰어가던 길남의 발소리만이. 방파제를 때리고 가는 파도소리만이 들려오는 사위는 적막했다.마지막 남겼던 길남의 말을 생각하면서 화순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길자가,그 요시코가 늘 하던 말이 있었지.언니는 왜 그렇게 화를 잘 내? 길자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소리를 질러대곤 하는 화순을 두고 한 말이었다.그 소리를 들을때마다 화순은 웃으면서 말했었다.
『그럼 너처럼 소귀신같이 살아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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