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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京仁運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조선시대 교통은 조운(漕運)이 대종(大宗)이었다.조운의 루트는 내륙에서 강을 타고 해안으로,해안에서 남해.서해를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화물은 당연히 쌀이 많았다.곡창(穀倉)인 충청.
전라.경상 삼남지방에서 거둔 세곡이 조운으로 서울 로 보내졌기때문이다.특히 중기이후 공물(貢物)을 쌀로 납부하는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조운수송은 더욱 늘어났다.
조운선(船)이 삼남에서 서울로 오자면 몇군데 험한 바다를 지나야 했다.태안반도 안흥량(安興梁)과 강화도 손돌목이 대표적인곳이었다.안흥량은 지금의 충남서산 안흥 앞바다로 물살이 세기로유명했다.태종(太宗)3년(1403)6월 경상도 에서 올라오던 조운선 30척이 침몰,1천명이 익사하고 쌀 1만섬이 바다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손돌목도 이에 못지 않았다.인천에서 북으로올라가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이곳은 암초가 많을뿐 아니라 조류(潮流)가 소용돌이치며 흘러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곳이다. 당시 세곡의 안전한 운반은 국가의 중대사(重大事)였다.
어찌하면 험한 바닷길을 피할 수 있느냐에 노력이 집중됐다.해답은 운하(運河)건설이었다.안흥량에서 가로림灣과 천수만을 잇는 길이 8㎞의 운하건설이 고려시대인 1134년부터 시작돼 그후 5백년동안 10차례나 시도됐으나 성공하지 못했다.한편 손돌목에선 고려 중엽 지금의 부평에서 운하를 뚫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하고,다시 조선조 중종(中宗)때 김안로(金安老)가 운하를 뚫어 김포에 연결하려 했으나 원통현고개 4백m구간 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이때 판 도랑이 굴포천(掘浦川)이며,지금은 김포평야의 중요한 관개수로(灌漑水路)역할을 한다.
훗날 정조(正祖)는『이 땅은 만년공호지지(萬年拱護之地:영구히보존돼야 할 성스런 땅)인데 어떻게 인력(人力)으로 뚫겠는가』라고 했다 한다.정조와 같은 영주(英主)도 운하에 대한 인식은부족했던 모양이다.
건설부는 20일 그동안 미뤄오던 경인(京仁)운하 건설을 최종확정했다.인천시 백석동에서 행주대교까지 길이 19.1㎞의 이 운하가 99년 완성되면 1천t급 바지船이 다닐 수 있고 2010년 물동량이 연간 2천3백만t에 달한다고 한다.오랜 세월 잠자던 김포 굴포가 이제 잠을 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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