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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의 한수] “구두가 좋고 구두 닦는 게 재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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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글쎄, 30년 넘게 구두만 닦았다는데 얼마나 울고 웃게 만들던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얼마 전 아는 분에게서였다. 말 그대로 30년 넘게 구두닦이로 살아온 사람이 동기부여 강사로 나섰는데 인상적이었다는 내용이다. 곧 그를 수소문했다.

그는 전라남도 도청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구두닦이 경력 34년의 한대중(51)씨였다(공식 용어로는 ‘구두미화원’이지만 그의 표현대로 ‘구두닦이’로 쓴다). “이래저래 바쁘다”는 그와 몇 번의 통화를 했고, 대통령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목포행 버스를 탔다. (2005년 10월 광주에서 무안으로 이전한 새로운 청사는 목포와 접경지대에 있었고 버스터미널에서 10분 정도 걸렸다.)

“제가 머리가 나쁘거든요”

도청에 도착해 휴대전화를 걸자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쪼그만 기다리시요, 잉.” 곧장 달려온 그는 지하 2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서너 평 남짓한 그의 작업공간에는 아침부터 그가 닦은, 그리고 닦아야 할 구두가 한방 가득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구두 사이 사이에는 각종 성공학 책들과 강연 테이프들이 놓여있었고 벽에는 각종 동기부여 전문 강좌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어구들이 적힌 A4 용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증거품’들이었다.

“(강사를)처음으로 해본 게 2006년 8월이었어요. 검정고시 동문회에서 32분 동안 제 살아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번째로 한 게 2007년 2월이지요. 여그(전라남도) 규제개혁 담당 공무원 워크숍에서 55명을 상대로 50분 동안 한 것인디, 시간을 딱 맞춰 끝냈어요.”

말하는 도중에도 구두를 닦는 손길을 멈추지 않던 그는 “시간을 딱 맞춰 끝냈어요”라는 말을 하고는 씩 웃었다. 그때의 기분이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녹음 테이프처럼 자신의 강연 스토리를 줄줄 풀어놨다. 8월까지 몇 월 며칠에 어디에서 몇 명을 상대로 몇 분을 강연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2007년 2월부터 8월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총 열두 번의 강연을 했다. 6월에만 다섯 번을 했으니 꽤 인기가 있었던 셈이다. 6월 29일 광주 동구청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기획했던 김주희(29·현재는 광주시청)씨는 “소극적으로만 살아왔던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솔직히 얘기했는데 눈물을 흘리신 분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강연을 끝내고 나면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지금요? 지금도 여전히 문의는 오는데 대통령 선거가 있어 그런지 좀 뜸하네요.”

전화할 때만 해도 전라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던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자 사투리를 쏙 감췄다.

전남 장흥에서 12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구두통을 잡은 것은 74년 8월이었다. 작은 건축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선 데다 할머니 암 투병에 병원비를 대느라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던 것이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그는 제대로 학비를 못 냈고 첫 시험날 선생님에게 시험지를 빼앗긴 후 학교를 떠났다. 그 후 3년 정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와를 만들던 작은아버지를 따라다녔던 그는 “구두를 닦으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끌려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저처럼 가난하거나 고아들이 대부분 구두를 닦았어요. 옛날 광주고속이 있던 자리에서 선배와 함께 구두닦이를 시작했는데 정말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피곤해 ‘하루 쉬겠다’고 했더니 빙 둘러서서 샌드백 치듯이 패더군요. 죽을 것 같아 도망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갈 데가 없어 다시 찾아갔어요. 구두를 닦는 방이 세 개 있었는데 그날 1, 2, 3호 방을 돌면서 종일 맞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3년 후에 독립했는데 정말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3분 스피치’ 300번 이상 연습

한대중은…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를 닦기 시작해 34년 동안 구두만 닦아 왔다.

92년부터는 전남도청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 하루 130~150켤레의 구두를 닦고 있다. 2002년 ‘내 삶을 바꿔보자’고 결심한 후 말 더듬을 극복하기 위해 ‘동기부여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피나는 연습을 했다.

1년 전 도청 공무원들의 워크숍에 초청돼 자신의 삶을 통해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요청이 와 10여 차례 강연을 한 ‘공부하는 구두닦이’다.‘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열아홉 살에 전남대 학생들이 운영하는 야학을 찾아갔고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야학을 하던 학교가 그가 쫓겨났던 바로 그 중학교였다는 사실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책 한 줄 보려면 잠이 쏟아져’ 애를 먹어야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중학교 과정을 보내고 검정고시를 봤다.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제가 저를 압니다. 제가 머리가 나쁘거든요.”

그는 달관한 듯 말했다. 30년 가까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지울 수 없는 좌절이었고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꿈꾸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를 탓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는 심한 말 더듬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돼서야 겨우 국어책을 읽었고, 몇 년 전까지도 발음이 나빠 의사소통이 어려웠을 정도였다. 검정고시에 떨어진 그는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싶어 군대를 택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중졸(中卒) 학력 때문에 ‘방위’ 판정을 받았다. 현실을 떠나고 싶었는데 그조차도 안 되는,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던 시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겐 독한 끈기가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공부를 계속한 그는 81년 고입 검정고시, 87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특히 대입 검정고시는 그의 말대로 “10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보너스도 따랐다. “이상하게 이때부터 IQ 70이던 머리가 점점 깨우쳐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성실함이 그 시작을 도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한대중이 가는 곳에는 먹을 게 없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내 것만 챙기지 않았다. 누군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내 일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덕분에 광주 시내 관공서를 두루 훑다시피 했고 92년 5월 다른 일을 하겠다는 후배가 “도청에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그의 하루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그는 하루에 130~150켤레의 구두를 닦는다. 구두 한 켤레 닦는 데 3~4분이 채 걸리지 않을 만큼 능숙한 솜씨를 갖고 있고, 500명이 넘는 단골의 구두를 번호표 하나 붙이지 않고 기억할 만큼 내공을 쌓은 그지만 정성껏 닦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좀 더 쓰는 까닭이다.

그를 바쁘게 하는 것은 또 있다. 그는 5년 전인 2002년 3월 2일(그는 항상 정확한 날짜를 말했다)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기로 하고 새로운 인생 목표를 정했다. 자신에게 붙어 있는 ‘소극적, 부정적 습관을 버리고 인생에서 승리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최고의 동기부여 강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좋아하던 술과 바둑, TV를 멀리했다. 대신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인기 강사들의 녹음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거의 외우다시피 한 책이 500권이 넘고 녹음 테이프가 100개가 넘는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역시 한 주에 한 번은 목포대 사회교육원에 개설된 화술반에 다닌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서울에서 하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최근에는 목소리를 다듬기 위해 판소리 강좌에도 나가고 있다.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부자를 꿈꿨습니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고 했어요. 제가 동기부여 강사가 되려고 한 것도 사실 2006년 4월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거든요. 제 발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보자’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화술반에서 배운 ‘3분 스피치’를 만들어 종일 말을 하고 다녔어요. 구두를 가져다주러 가는 사무실에서도 했고, 심지어 서울에 가면 지하철 안에서도 큰 소리로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3분 스피치 내용 하나를 300번 이상 했어요.”

그는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한 일도 힘들었겠지만 ‘안 된다’는 ‘부정적 생각’과 싸우는 것도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올(2007년) 2월 (두 번째로 한) 50분 강연을 하는데 말이 술술 나오더라고요.”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당시를 떠올렸다. 고통이 크면 기쁨도 크다는 점에 비춰보면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목표를 지켰다. 그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만나면 돈 얘기만 하고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친구는 사절이다. 대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강연을 위한 준비를 보면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짐작이 간다. 그는 한 번 강연을 나갈 때마다 최소한 10시간의 실제 연습시간을 가진다. 실제 연습이란 도청 강당에서 강연대를 앞에 두고 하는 연습이다. “그 정도로 연습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습관 고치는 데 3년 걸렸죠”

“이건 언젠가 들은 얘긴데, 중국에서 9년 동안 메인 뉴스의 앵커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1주일에 한 번씩 발음 교정을 받는답니다. 또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조수미씨도 1시간 무대를 위해 3000번을 연습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해봤는데 조금만 연습을 소홀히 하면 강연에서 티가 나요. 사실 구두를 닦는 것도 그렇지만 뭔가를 잘하려면 끊임없이 반복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 같아요.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요.”

준비하고 연습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광주에 있는 집에도 일주일에 한 번만 간다. 출퇴근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작업공간 근처에 있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쓰는 방에서 자는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한다.

별일이 없는 한 하루 10시간 동안 세상에 찌든 때가 덕지덕지 앉은 손님들의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만들어 놓는다. 34년 동안, 종일 구두만 닦는 반복되는 작업이다. 지겹지 않을까?

“이걸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겹다고 생각하면 피곤해서 못해요. 저는 구두가 좋고 구두를 닦는 게 재미있습니다. (옆에 있는 귤 하나를 달라고 하더니) 남들은 구두 속에 이렇게 귤을 넣어 놓으면 지저분해서 안 먹겠다고 하지만 저는 더 맛있게 보입니다.”

그는 이런 습관을 길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긴 하지만 희망이 보이는 듯해서 그는 요즘 기분이 좋다. 그에게 “희망이 어디에서 생기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감”이라고 답했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얻은 그만이 아는 결실이다.

“자신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져요. 세상에는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꿈을 꾸고 시한을 정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기적도, (인생의) 답도, 힘도 모든 게 다 자기 안에 있어요.”

세 시간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 볼품 없이 놓여있던 40~50켤레의 구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로 바뀌어 있었다. 손놀림을 쉬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구두만 닦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닦고 있었다.

전남 무안=서광원 이코노미스트 기자 ara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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