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기록하는 버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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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85년 일본 중부 군마현의 오스타가 산중턱에 일본항공의비행기가 추락했다.탑승객 5백16명이 사망한 대형참사였다.
추락하기 직전 그 긴박한 최후의 5분간에서도 몇몇 일본인 승객들은 눈물겨운 유서를 남겼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공포의 순간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마지막 말을 수건이나 종이조각,심지어 멀미용 비닐주머니에 갈겨쓰고 비행기와 운명을 같이했다.
희생자의 유서는 모두 피로 물들여져 있어 추락당시의 참상을 말해 주고 있다.특히 어떤 메모는 사고 원인 조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도록 급히 현황을 기록해 둔 흔적도 보인다.
『모두 힘을 내서 엄마를 도와주기 바란다.나는 지금 매우 슬프다.기내에 연기가 가득하다.비행기가 내려가기 시작한다.6시30분이다.아이들을 잘 부탁하오.비행기가 급히 떨어진다.지금까지살아온 나의 행복한 삶에 감사하오.이제 모든 것 이 끝인것 같소.』 지금 읽어보아도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유치원때부터 일기쓰기를 습관화시키는 서구인들의 예지는 놀랍다. 대체로 우리네 습속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생활에 젖어 있다.기록하지 않는 것이 자기 삶에 도움을 준다고도 생각한다.
필자도 일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난 이후 일기를 쓰지 않고있다. 상업은행도 95년 역사가 있지만 중요한 기록의 대부분은일본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이 본관 건물 보수를 위해 설계도를 일본에서 찾아온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록하지 않는 습관은 기록으로 인해 화를 입었던 선조들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기록으로 인해 멸문(滅門)의 화를 입은 역사가 허다하지 않았던가.
기록이 없으면 언제나 백지에서 새로 출발해야 한다.선진국이 되는 길,세계화의 첫걸음은 기록하는 습관에서 비롯돼야 한다.그리고 그 일은 한시도 미룰 일이 아니다.
〈상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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