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94>7.사회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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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인당 국민소득 8천달러 시대에 수돗물마저 안심하고 마실 수없는 현실,오렌지족으로 대변되는 향락주의가 부른 끔찍한 존속살인,심화된 빈부의 격차와 가치 상실이 빚어낸 살인공장….우리사회의 어두운 일면들이 낱낱이 모습을 드러낸 한해 였다.
무엇보다 성수대교 붕괴와 도세(盜稅)는 개발과 성장의 뒤안길에서 우리사회 곳곳에 만연된 총체적 부실과 흐트러진 공직윤리를극명하게 보여주었다.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세계화에 앞서 우선적으로 극복해야할 과제로 던져졌다.
연초 영남지역 수돗물의 악취소동에 이어 터져나온 낙동강 발암물질 오염사고는 우리나라가 과연 선진국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환경처장관의『수돗물을 끓여 마시라』는 대국민 경고발표는 국민들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권리이자 국가의 기본책무인「맑은 물 공급」마저 제대로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이는 동시에 환경보전을 무시한 개발정책의 폐해를 실감으로 깨닫 게한 계기이기도 했다 목포시의회가 수돗물공급 중단을 발표하면서 지하수개발이 러시를 이뤘고 정수기.생수는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등장했다.
특히 3월초 대법원이『생수판매 금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무효』라고 판결함에 따라「먹는 샘물」로 공식명칭이 바뀐 생수는 내년 5월부터 콜라.사이다등 음료수와 함께 가게의 진열대에 공식적으로 놓이게 됐다.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불거져 나온 상문고(尙文高)비리는 썩을대로 썩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상문고 교사들의 양심선언에 의해 밝혀진 비리는 이사장의 찬조금.보충수업비등 22억원 착복,학생 11명의 내신조작등 한마디로 학교를 개인의 사유물화한 것이다.
이같은 사학의 부패에는 교육청과 시의원까지 비리묵인.수뢰등의형태로 가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유학생의 수십억원대 유산을 노린 부모살해는 청년들의 가치관 상실과 이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부모를 수십차례 찔러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박한상(朴漢相)군의 패륜범행은『프라이드가 감히 끼어든다』며 그랜저를 탄 사회지도층 인사의 자제들이 저지른 폭행과 함께 오렌지족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냈다.
남북정상회담 발표로 온국민이 들떠있던 7월초 김일성(金日成)의 사망은 분단 반세기에 한 획을 그으면서 한편으론 통일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했다.
이 와중에 전남대의 분향소 설치와 한총련의 조문단 파견결정,일부 국회의원의 조문발언등은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속 통일시대에서의 분단의 아픔과 비극을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특히 서강대 박홍(朴弘)총장의『주사파 뒤에 사노맹이 있고,사노맹뒤에는 사로청이,그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으로 시작된 주사파 파동은 아직 우리나라가 넘어야할 이데올로기의 높은벽을 실감케 했다.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 도세(盜稅)사건으로「설마」했던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9월중순 인천시 북구청장의 직위해제로 빙산의 일각을 드러낸 세금도둑 사건은 11월들어 경기도부천시에서도 확인되면서 거대한부패의 고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법무사 등이 포함된 세금도둑은 은행수납인까지 위조해 수십억원대의 재산세.등록세 등을 횡령했고,이같은 도둑질은 전국적인 상황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특감결과 서울.부산.대구등 71개 시.군.구에서 33억원의 혈세를 도둑맞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 또한 부패의 바닥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하에 살인공장을 차려놓고 납치범행을 저지른 지존파일당의 만행은 추석연휴 뒤의 온국민을 경악에 빠뜨렸다.
수갑.포승에 묶인 범인들이『압구정동 오렌지족.야타족등 모두 죽이지 못한게 한스럽다』고 차갑게 내뱉는 사회부정의 목소리는 섬뜩하게 느껴졌다.이들에게 납치돼 피랍자의 가슴에 총을 겨누도록 강요받았던 여인이 기지와 용기로 현장을 탈출, 이들의 범행을 신고한 또하나의 드라마는 그나마 우리사회의 가능성을 보인 셈이었지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은 여주인공은 지금도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후일담이다.
현대백화점의 우수고객 명단을 입수한 이들은 총기로 무장한뒤 불특정 다수인에 대해 본격 인간사냥에 나설 계획임이 밝혀지기도해 범죄양상의 변화에 사회의 경각심을 높이기도 했다.
이어 연쇄적으로 터진 온보현(溫保鉉)의 훔친 택시를 이용한 부녀자 납치살해,김경록(金京錄)의 증인가족 보복살해 역시 물질만능 시대속 인간성 상실과 당국의 치안능력에 한계를 보인 결과가 됐다.「소대장 길들이기」로 나타난 군대내의 하 극상(下剋上)은 국가를 지키는 방패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임을 나타냈다. 9월말 건군(建軍)이래 처음으로 소위 2명과 하사관 1명이 무장 탈영함으로써 드러난 하극상은 사병들이 소대장을 구타하고,능멸하고,명령에 불복종하는 그야말로 군기강이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주었다.
10월말 전방사단에서 서문석(徐文錫)일병이 중대장과 소대장을향해 조준사격하고 동료 10여명을 쏘아 중상을 입힌 것도 떨어진 군기강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속담이 무색한 성수대교 붕괴는 보릿고개를 넘어 허리띠를 졸라맨채 앞으로만 달려온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그대로 대표하는 것이다.수도 서울의 대표적인 다리가 그대로 뚝 잘려 한강속으로 떨어지면서 32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는 사태에 정부도 시민도 할말을 잊었다.
한강다리의 위험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것임에도 불구하고『문제없다』는 서울시의 안일한 대처속에 일어난 것이어서 부실공사와 함께 부실관리의 문제가 제기됐고 이후 전국의 교량.건물.지하철도등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이 실시됐지만 이 는 부실공사의 만연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충주호에서의 유람선 화재로 29명이 사망.실종된 것이나,서울아현동 도심복판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9명이 숨진 것이나,경남밀양에서 무궁화호 열차충돌로 4명이 숨진 것도 선진국을 지향하는 나라로서는 너무도 부끄러운 원시적인 사건이었다 .
올들어 일어난 이들 사건들은 물질만능풍조의 한 단면을,인명경시의 현주소를,성장일변도의 짙은 그늘을,썩을대로 썩은 부패의 뿌리를 들춰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편으로 세계화의 길목에서 우리사회 구석구석을재점검,튼튼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같다.
〈朴鍾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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