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얼 양림동 제대로 알려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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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이 1910년대 세워져 전쟁고아 보육시설로도 활용된 ‘우일선(미국이름 Wilson) 선교사 사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양림동은 광주의 본향(本鄕) 같은 곳입니다.”

 10대째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서 살고 있는 차종순(59) 호남신학대 총장. 그는 2004년 6월 총장에 취임한 이후 양림동 알리기 첨병을 자처하고 나섰다. 양림동의 풍성한 문화유산이 잊혀져 가고 있는게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양림동을 제대로 알려 희생과 나눔의 정신을 일깨우고 싶다”고 말한다.

 ◆내고장 알리기 자원활동가 양성= 5일 호남신학대 명성홀에서는 양림동의 역사와 문학·예술·생태를 공부한 56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차 총장이 10월 광주시 남구와 함께 호남신학대에 주민을 대상으로 ‘내고장 알리기 자원활동가 양성과정’을 열었다.차 총장을 포함 10명의 강사진이 강의와 탐방을 이끌었다. 수강생 이춘홍(65·사진작가)씨는 “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주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며 “차 총장님의 열정이 종교적 차원을 떠나 수강생들을 더욱 분발하게 했다”고 털어놨다. 차 총장은 “당초 30명을 예정으로 강의를 마련했는데 100여명이나 몰릴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며 “조만간 별도의 양림동 역사·문화 전문 안내자 교육과정을 열겠다”고 말했다.

 차 총장은 “오늘 광주의 모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늘 양림동에 와 닿는다”고 강조했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광주 양림동에 들어오면서 교회·병원·학교가 생겼다. 이들 시설을 통해 과학적 사고와 인권의식이 피어났다. 이 곳에서 국내 처음으로 한센병을 치료하고 결핵환자를 구했으며,애국·계몽운동 일어났다. 이후 양림동은 1960년대 초까지 광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다형 김현승(1913~1975) 시인과 음악가 정율성(1914~1976 ) 등이 이 동네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양림동에는 개화기를 이끈 선교사들의 선교와 의료봉사,사회복지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호남신학대 동산에는 전라도에 온 미국인 선교사 22명이 묻혀있다. 1910년께 세워져 전쟁고아의 보육시설로 활용된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1911년 지어진 수피아 학교의 모태가 된 수피아 홀 등 20채의 개화기 유적이 집중돼 있다.100년 이상된 호랑가시나무 숲은 푸근함을 준다. 차 총장은 “이 같은 환경에서 총장으로서 학교 살림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양림동을 알려 학교와 지역사회에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부강연 등을 통해 “양림동 이야말로 광주의 역사와 문화의 보고로 헌신과 봉사의 정신을 되새겨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양림동을 널리 알림으로써 시위 등으로 인한 광주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걷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광주의 공동체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한 양림동을 문화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 종합계획에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조성사업’을 포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양림동은 개화기 기독교 성지로 1300만 교인들의 순례지는 물론 광주의 근대문화 발상지로 각광받기에 충분하다”며 “양림동이 광주에 새로운 부(富) 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외국인을 포함 매달 400여명의 순례자들이 호남신학대 선교 묘역을 찾고 있다고 소개했다.

 학교 도서관 1층에 2005년 5월 문을 연 ‘티 브라운’ 카페는 도심 속 색다른 휴식공간으로 이름이 났다. 널따란 유리창을 통해 무등산의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애초 창고처럼 방치돼 있던 이곳에 차 총장이 학교 설립자 조지 톰슨 브라운(87) 미국 남장로교 목사의 이름을 따 커피숍을 냈다.

 그는 “학생과 주민들이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에 앉아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을 바라보며 쉴 수 있기를 바라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며 “호응이 높아 5000만원에 가까운 수익을 내 장학금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글=천창환 기자 ,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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