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이용해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백남준씨. [중앙포토]
우리 셋은 함께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그런데 백 선생이 좀 무거워 보이는 큰 노란 봉투 한 개를 안고 나오는 것이다. ‘저건 뭐에 쓰려고 하나’. 그 봉투에는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걷다가 갑자기 옆 골목으로 접어들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뭘 하나 하고 유심히 봤더니 그는 길가 커다란 쓰레기통에 그 봉투를 살짝 내려놓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백 선생은 종이봉투에 집안 쓰레기를 잔뜩 담아서 거리에 버리는 꼼수를 쓰는 중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백 선생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하고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다던 사람이 아주 큰 자루를 지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미스터 황, 롱아일랜드에 내 친구가 살아. 밥 먹고 이제 만나러 갈 건데 그 사람에게 줄 선물이야.” 그래서 뭔데 그렇게 크냐며 한번 보자고 했다. 열어 보니 모두 흙이었다.
이 괴짜 예술가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한복판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내가 뉴욕에 머물렀던 두어 달 동안 우리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 온갖 공연을 보러 다녔다. 히피 문화가 뉴욕을 휩쓸었을 때다. 많은 히피들을 소개시켜줬다.
그는 모든 예술가들과 친구였다. 존 케이지도 그가 소개한 예술가다. “미스터 황, 다른 어떤 음악회보다도 이건 꼭 가봐야 돼. 케이지는 정말 위대한 예술가거든.” 음악회의 제목은 ‘전자 귀(Electric Ear)’. 젊은 사람들이 춤추는 곳으로 유명한 ‘일렉트릭 서커스(Electric Circus)’라는 댄스장에서 열린 공연이다. 관람객들로 꽉 찬 댄스장 안은 한국의 만원버스 속 같았다. 케이지는 아주 유명한 잡지의 편집장과 함께 댄스장 맨 안쪽의 무대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무릎 높이의 낮은 마루 위에 앉아서 체스를 두는데, 그가 체스판 위의 말을 움직일 때마다 전기회로가 바뀌면서 음악도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는 끼리끼리 얘기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시끄러웠고 음악이라고 나오는 게 전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공연장을 나오며 내가 “저 사람 정말 사기꾼 아니오?”라고 따지려는 순간 백 선생이 먼저 입을 뗐다. “오늘 음악회는 유달리 좋네. 저렇게도 전혀 계산을 하지 않는 예술가는 처음 봤어. 하여튼 케이지는 무서운 예술가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음악을 꼭 열심히 들을 필요가 뭐가 있어. 한국 환갑잔치를 생각해봐. 옆에서 밥도 먹고 씨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가 듣고 싶으면 또 듣는 거야.” 내 상식은 산산조각이 났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