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5. 백남준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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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이용해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백남준씨. [중앙포토]

“그럼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1968년 뉴욕에서 처음 만난 백남준 선생과 나는 금방 가까워졌다. 나는 가야금 얘기를 하면서 요즘 연주하고 있는 음악을 화제로 삼았고, 그는 즉석에서 전화해 예술 파트너인 샬롯 무어만을 불러냈다. 무어만 또한 매우 소박하고 친절한 여성이었다.

우리 셋은 함께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그런데 백 선생이 좀 무거워 보이는 큰 노란 봉투 한 개를 안고 나오는 것이다. ‘저건 뭐에 쓰려고 하나’. 그 봉투에는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걷다가 갑자기 옆 골목으로 접어들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뭘 하나 하고 유심히 봤더니 그는 길가 커다란 쓰레기통에 그 봉투를 살짝 내려놓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백 선생은 종이봉투에 집안 쓰레기를 잔뜩 담아서 거리에 버리는 꼼수를 쓰는 중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백 선생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하고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다던 사람이 아주 큰 자루를 지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미스터 황, 롱아일랜드에 내 친구가 살아. 밥 먹고 이제 만나러 갈 건데 그 사람에게 줄 선물이야.” 그래서 뭔데 그렇게 크냐며 한번 보자고 했다. 열어 보니 모두 흙이었다.

이 괴짜 예술가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한복판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내가 뉴욕에 머물렀던 두어 달 동안 우리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 온갖 공연을 보러 다녔다. 히피 문화가 뉴욕을 휩쓸었을 때다. 많은 히피들을 소개시켜줬다.

그는 모든 예술가들과 친구였다. 존 케이지도 그가 소개한 예술가다. “미스터 황, 다른 어떤 음악회보다도 이건 꼭 가봐야 돼. 케이지는 정말 위대한 예술가거든.” 음악회의 제목은 ‘전자 귀(Electric Ear)’. 젊은 사람들이 춤추는 곳으로 유명한 ‘일렉트릭 서커스(Electric Circus)’라는 댄스장에서 열린 공연이다. 관람객들로 꽉 찬 댄스장 안은 한국의 만원버스 속 같았다. 케이지는 아주 유명한 잡지의 편집장과 함께 댄스장 맨 안쪽의 무대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무릎 높이의 낮은 마루 위에 앉아서 체스를 두는데, 그가 체스판 위의 말을 움직일 때마다 전기회로가 바뀌면서 음악도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는 끼리끼리 얘기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시끄러웠고 음악이라고 나오는 게 전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공연장을 나오며 내가 “저 사람 정말 사기꾼 아니오?”라고 따지려는 순간 백 선생이 먼저 입을 뗐다. “오늘 음악회는 유달리 좋네. 저렇게도 전혀 계산을 하지 않는 예술가는 처음 봤어. 하여튼 케이지는 무서운 예술가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음악을 꼭 열심히 들을 필요가 뭐가 있어. 한국 환갑잔치를 생각해봐. 옆에서 밥도 먹고 씨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가 듣고 싶으면 또 듣는 거야.” 내 상식은 산산조각이 났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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