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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송한 물리 II ‘정답’ 결정…많이 아는 게 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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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03면

수능 출제·채점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명준 수능처장은 22일 “한국물리학회의 복수 정답 인정 의견에 대해 ‘맞다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한국물리학회가 올해 수능 과학탐구 영역의 물리Ⅱ 11번 문제에 대해 “복수 정답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으나 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이 처장은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에 따라 출제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그 원칙에 비춰 이 문항은 이상이 없다”고 덧붙였다. 해당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한국물리학회의 견해는 고교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채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교육평가원 “교과서 범위에선 문제 없어” … 학계 “명백한 오류”

이날 오후 평가원과 교육부 관계자들은 평가원 사무실에 모여 수능 복수정답 인정에 따른 파장을 놓고 회의를 거듭했다. 한 참석자는 “서울대 등이 이날 오후 대입 정시모집 원서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복수 정답을 인정할 경우 빚어지는 대입 혼란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올 수능에서 9등급제가 도입되면서 수험생들은 적지 않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복수 정답까지 인정하게 될 경우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2008 대입이 파국을 맞을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감돌았다고 참석자는 전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원의 해명과 대처는 오히려 수험생들의 더 큰 반발을 부를 수 있다.

등급제 파동에 뒤이은 복수 정답 불인정은 수능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물리학회와 평가원은 물리Ⅱ 11번 문제를 놓고 커다란 입장 차를 보였다. 11번 문제는 이상기체의 내부에너지를 묻는 것이다. 이상기체는 단원자 분자와 다원자 분자로 나눌 수 있으며, 다원자 분자를 전제로 할 경우 정답은 두 개가 된다는 게 물리학회의 견해다. 이에 비해 평가원 측 관계자들은 “고교 수준에서 배우는 이상기체는 당연히 단원자 분자 기체를 전제하고 있다”며 “굳이 11번 문제 아래에 ‘단원자 분자 기체에 한정한다’는 전제를 달지 않아도 답은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교과서 범위 안에서는 답은 하나이지만 교과서 수준을 넘어서면 답은 두 개가 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물리학회 김정구 회장은 “고교 교과서 수준을 벗어나는 내용을 알고 있는 수험생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는 게 이번 논란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물리학회는 평가원의 결정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명명백백한 사실을 덮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 많이, 깊게 아는 학생이 교과서 내용만 아는 학생보다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상위권대 이공계를 겨냥해 공부해온 수험생이 손해를 봤을 확률이 커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부 교과서가 다원자 분자 기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도 평가원의 설명을 궁색하게 한다. 교학사가 출판한 물리Ⅱ 교과서는 산소나 이산화탄소 등 다원자 분자 기체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회전 및 진동에 의한 에너지 등을 가지므로 한 기체 분자 1몰의 내부 에너지는 (단원자 분자 이상기체의 경우인) 3/2RT보다 커진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이에 대해 평가원 이처장은 “이런 내용은 교과서의 읽기 자료나 여백 부분의 자세한 내용에 담겨 있는 것”이라며 “수능은 60만 명의 수험생이 보는 보편적 내용을 대상으로 한다”고 반박했다.

지난 7일 성적 발표 결과 올해 수험생 총 55만여 명 중에서 물리Ⅱ 과목에는 총 1만9597명이 응시했으며, 이들 중 991명(5.06%)이 1등급을 받았다. 진학교사들은 3점짜리 두 문제를 틀리면 2등급으로 떨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1번 문제를 복수정답 처리할 경우 등급이 뒤바뀌는 대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수시모집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물리Ⅱ의 등급이 나쁘게 나와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집단 소송을 제기할 경우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서강대 김영수 입학처장은 “수시 모집이 끝난 상태에서 성적 처리를 다시 해야 할 경우 대학들도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와 평가원이 ‘복수 정답 불인정’ 을 선언한 것도 ‘입시의 안정성’을 고려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평가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소동은 결국 법정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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