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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 대신 붓 쥐고 이 땅의 막장을 지킨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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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03면

사진 권혁재 기자

태백시 황지동 김흥억씨 댁(전세 300만원), 화전1동 1통 1반 서용춘씨 댁(보증금 100만원, 월세 12만원), 황지동 대윤아파트 2동 107호(전세 800만원)…. 1982년 9월 이래 황지에 살고 있는 화가 황재형(55)의 집살이 기록이다. 세상이 끓어오르면서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91년 5월 전시 뒤 16년 만에 그가 역시 탄광 그림을 들고 서울에 나타났다. ‘쥘흙과 뉠땅’이란 이름으로 여는 다섯 번째 전시회(2008년 1월 6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다.

16년만에 개인전 연 탄광촌 화가 황재형

텁수룩한 수염에 두툼한 손이 여일한 이 탄광촌 화가는 “쥘흙은 있어도 뉠땅이 없는 이들의 노래는 여전하다”고 인사했다.

김흥억씨 댁에 살 때, 갱에서 일을 마치고 오면 방이 딸린 점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늘 문을 닫아놓고 작업을 해 그가 화가인지 아무도 몰랐다. 안경 쓴 사람은 탄 캐는 일에 받아주지 않아 렌즈를 껴야 했다. 땀이 흘러내려도 눈을 닦을 수가 없어 쌍꺼풀에는 늘 화장을 한 듯 검은 탄가루가 가로로 박혀 있었다.

서용춘씨 댁에 살 때, 탄가루와 돌가루 때문에 만성결막염이 도져 갱 밖 난장일(목공)로 물러나야 했다. 색을 맘껏 못 주무르게 되자 목공소 자리에서 판화 작업을 했다. 광부 자식들이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1주일을 매달렸다. 그 일은 이내 ‘태백마당’을 여는 계기가 됐다.

하반신이 끊어진 희숙이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장애인특수교육센터인 ‘사랑의 집’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벽화 작업도 시작했다. 고한과 황지성당, 하물며 찻집 벽에도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면 그림은 거기 있어야 했다.

황재형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지만 이제 태백 사람이다. 그저 그림만 그리는 이가 아니라 탄광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의 광산에서 불을 캐는 광부다. 그림 붓은 그에게 삽이다. 대처 사람들은 그에게 아직도 거기 사느냐고 묻곤 한다. 광부도, 작부도, 노동운동가도 떠난 시대의 오지가 광산촌이다.

황재형의 그림에는 어떤 예술적 허위나 어쭙잖은 잔재주도 틈입하지 못한다. 방금 갱에서 나온 광부, 쓰러질 듯한 집 귀퉁이에 서 있는 푸릇한 파 한 줌, 빈 광산촌에 밀고 들어오는 깊고 끈끈한 노을, 그리고 서사적 필치로 거침없이 그려낸 기상 넘치는 산은 보는 이를 압도해 단번에 망각에서 생동하는 현실로 끌어올린다.

리얼리즘의 정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건한 힘이 화폭을 넘어 대지를 타고 흐른다. 그를 ‘한국의 일리야 레핀(러시아의 리얼리즘 화가)’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긴 말 대신 그는 ‘도계역에서’라는 시를 건넸다. 전시를 보고 간 사람이 보내줬는데 처음 탄광을 찾아 들어갈 때 제 심정을 들여다보는 듯하다고 했다.

“오르면 탄광/아래는 오징어 배 불빛/도계역 비탈에서는 기차도 담배 한대 말아 피우면서 서성거린다(…)//검은 사내들이 게걸음으로 돌아간/빈 역 광장을 가로질러/트럭 한 대가 언 길을 비틀거리며 동해로 떠났다//(…)//도계역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갈 수 없다/올라가면 광부/내려딛으면 뱃놈 팔짜(…)”
서해성(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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