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속 조난 3일 … 사랑으로 버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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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털링 시티에서 조슈아(왼쪽에서 둘째)와 알렉시스(왼쪽에서 셋째)가 구조대원의 도움을 받아 헬리콥터에서 내리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나무를 베러 숲에 들어갔던 이들은 폭설로 고립됐다 사흘 만에 무사히 구조됐다. 작은 사진은 이들이 타고가다 폭설에 갇혀 버린 차량. [스털링시티 AP=연합뉴스]

'도와주세요(HELP)'.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 순찰 헬리콥터가 하얀 눈밭 위에 나뭇가지로 쓰여진 구조 요청을 발견한 것은 19일 오후(현지시간). 프레데릭 도밍게스(38)와 세 아이의 악몽 같은 사흘이 비로소 끝났다.

성탄 트리에 쓸 나무를 베기 위해 숲에 들어갔다가 눈 속에 갇힌 아버지와 세 자녀가 무사히 구조돼 미국인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인 제임스 김이 폭설에 고립된 부인과 두 딸을 살리기 위해 구조 요청에 나섰다 길을 잃고 숨진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만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초인적 가족 사랑을 보여준 제임스 김의 비극에 함께 울며 그를 추모했다.

◆조난과 구조 상황=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 인근에 살던 도밍게스.크리스토퍼(18).알렉시스(15).조슈아(12)가 나무를 구하기 위해 160㎞ 떨어진 숲으로 들어간 것은 16일.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쏟아졌고 가족은 해마다 오던 숲에서 길을 잃었다.

이들의 실종은 하루가 지나서야 알려졌다. 도밍게스의 전처가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17일 저녁 뒤늦은 수색 작업이 시작됐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또 한번의 눈보라가 몰아친다는 기상 예보까지 나왔다. 자칫하면 눈보라가 발자국까지 휩쓸어 버리고, 기상이 악화하면 헬리콥터 수색을 중단해야 하는 위기였다.

그러는 동안 나뭇가지 구조 요청이 수색대의 눈에 띄었고, 뒤 이어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도밍게스와 아이들이 발견됐다. 병원에 옮겨진 이 가족은 약간의 동상과 탈수 증상 외에 다른 증상 없이 건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빛난 부성애="두렵지만 할 수 있다고 믿었죠. 아이들만은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어요." 병원에서 기자들을 만난 도밍게스는 공포의 순간을 되짚었다.

걸어도 걸어도 온 세상이 새하얀 눈밭이었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졌고 아이들은 지쳤다. 아빠는 곱은 손으로 아이들을 다독이며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되새겼다.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아이들의 발에 동여매고 쉬지 않고 주물렀다. 다리 밑에서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공포를 쫓았다.

특히 겁에 잔뜩 질린 막내를 달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 아들, 아빠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궁금하지 않니. 돌아가면 알게 될 텐데…"라며 막내를 안아 줬지만 마지막 24시간에는 막내를 포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기도 했다고 도밍게스는 회상했다. 안정을 되찾은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마디는 "내년에는 플라스틱 트리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 같아요"였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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