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7. 일본과 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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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복원(復員)이라고 했다. 복원열차는 느렸다. 모두 큰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셈이었나. 군복이니 모포니 한 짐이 되게 주고 월급도 몇달치를 주었다.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달리는 열차는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사흘이 걸렸던가.

이제 배만 타면 된다 했더니 부두 앞이 시장처럼 붐볐다. 일본 각지에서 돌아오는 수천명의 조선인 병사들이 들끓고 있었다. 언제 배에 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 우리는 하카다(博多)로 갔다. 야나기바시 소학교에서 기다리란다. 일주일이 1년처럼 느껴졌다. 거기에서 묘한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 부대에서 말(馬)중대 장교가 된 김아무개. 일본인 병사들을 모아놓고 황도(皇道)를 열변하던 친구를 죽여버리자는 것이 아닌가. 신경희씨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빨리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경희씨가 승선 지휘부로 달려갔다. 초라한 모습으로 조선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이 경성일보 같은 것을 가지고 오면서 지금 조선에서는 일본인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신경희씨가 지금 조선에는 지식인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고 송환 책임자에게 말했다. 우리를 먼저 보내줘야 될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것이 통해 우리는 한밤에 시모노세키 위쪽의 어느 해변에서 배를 탈 수 있었다. 시모노세키 부두에는 1천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성급하게 밀선을 타고 떠났던 사람들이 현해탄(대한해협) 한복판에서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모국. 조국이 저기 가면 있다. 우리가 그렇게 그리던 부모형제도 건너가면 다시 만난다. 군복 입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돌아간다. 이게 어디서 날아온 행운인가. 현해탄의 격랑은 여전히 거칠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날이 새면서 희미하던 산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질 무렵,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합창이 시작됐다. 그 시대는 다 지나갔다. 이젠 신나는 노래만 부르자! 누가 외쳤는가.

"신나는 노래가 뭐 있어?"

"비단이 장사 왕서방 할까?" 웃음이 터졌다.

"목포의 눈물 하자!"

"그것도 슬프다!"

누군가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합치더니 모두 따라 부르지 않는가. 가사도 곡도 어쩐지 슬픈데 어찌된 일인가. 울먹이면서도 소리 높이 부르지 않는가. 이것이 조선사람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다!

"조선독립 만세!"가 번져나갔다. 갑판 위가 떠나가도록 울부짖을 때 부산항 부두에 태극기 인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외칠 때 우리도 외쳤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보일 때 우리는 펑펑 울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험난했던 세월의 종말은 그저 눈물, 눈물, 그리고 만세 소리뿐이었다.

35년간의 세월이여. 깨끗하게 끝나다오. 그 어둠의 세월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한 이 아침! 고마워라. 고마워라. 고마워라.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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