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고 우겨 온 좌파 지식인 정직해져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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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크게 이겼다. 차점자인 정동영 후보보다 무려 530여 만 표를 더 얻었다. 이런 결과는 물론 두 차례 좌파 정권의 실정(失政)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실정은 결정적이어서, 많은 시민이 꼭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여당은 마땅한 전략이 없었고 결국 '네거티브 캠페인'에 전념했다. 네거티브 캠페인은 상대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는 효과가 크지만, 자신의 지지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다수 시민이 정권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정권이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정책으로 구현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아울러 패배의 충격을 증폭시켰다. 뚜렷하고 일관된 정책은 패배의 충격을 흡수하고 다음 선거의 동력을 제공한다.

이처럼 여당이 호소력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한 까닭은 그들에게 사회적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릴 사회철학이 없었다는 사정이다. 여당이 지닌 사회철학은 바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것이었다. 바로 그런 철학이 문제들을 낳았으므로, 올바른 진단과 처방이 나올 수 없었다. 노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이 아직도 자신의 철학과 정책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990년대 초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와 비슷하다. 공산주의 이론으로는 공산주의가 낳은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주의 사회에선 자유주의와 주류 경제학을 따르는 지식인들이 그 일을 맡았다. 그들과 우리 좌파 정당들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이질적이고 낯선 이념과 체제를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원래 우리 사회를 이룬 원리들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는 그만큼 쉽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좌파 지식인들의 지적 정직이다. 이제 사회주의는 좋지 못한 이념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과 정보의 집중은 압제와 부패를 낳고, 사회적 소유는 비능률과 의욕 상실을 부르며, 중앙의 계획 부서에서 짠 계획은 거칠면서도 경직돼 경제활동을 극도로 제약하고 혁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점은 너무 많은 사례에 의해 증명돼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의도가 아무리 고귀하고 청사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의 천성에 대한 그른 견해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는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임이 증명됐다.

그러나 당시 우리 사회의 좌파 지식인 가운데 그 사실을 인정한 이는 아주 드물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념에 그대로 매달렸다. 사회주의가 현실에서의 검증을 통해 논파(論破)되었음을 인정하는 대신, 그들은 틀린 것은 '현실 사회주의'지, '이론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기묘한 논리를 폈다. 이론은 현실에서의 검증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과학 철학의 기본 명제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런 지적 부정직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해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룬 우리 사회에 뒤늦게 사회주의를 실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심지어 잊혀진 헨리 조지의 이론까지 이 땅에서 부활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예측한 대로, 두 차례 좌파 정권에 의한 사회주의 실험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자신의 낡은 이념과 논파된 이론을 '진보'라는 말로 치장해 온 좌파 지식인들은 이제 지적으로 정직해져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가치에 맞으면서도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사회철학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철학 위에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미국의 민주당 같은 현대적 좌파 정당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를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민주노동당의 쇠퇴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산사태(landslide)'가 난 이번 선거에도 불구하고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념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좌파 정치인들을 흙더미 속에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좌파 지식인들이 제공하는 현실적 좌파 이념 없이는, 좌파 정당들은 15대 대통령 선거처럼 정치적 야합을 꾀하거나 16대나 17대처럼 네거티브 캠페인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복거일=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상대 졸업. 소설가이자 시인.사회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가 대표작이다. 중도 보수를 표방하며 지난해 11월 발족한 문화예술인단체 '문화미래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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