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윤찬이 덩치들과 무언가를 말하면서 소라와 나를 가리켰다.덩치들이 우리를 일제히 쳐다보는 게 보였다.윤찬이 우리쪽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자 가자구.저놈들,소라에게 앞으론 집적거리지 않을 거야.』『그럼 뒤로 집적대겠단 말이니.』 내가 조금 야하게 농담을 했지만 소라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소라는 윤찬이 덩치들과 어떻게 담판을 지은 것인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근데 저 사람들한테 뭐라구 그랬길래 금방 손을 든 거야?』『으응… 너희 둘은 결혼을 약속한 관계라구 그랬지 뭐.그러면서너희 둘을 뒤돌아보니까 정말이지 어울리더라구.그놈들이 속을만 하더라니까.』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아니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결혼을 약속해야 하는 거야?』 결혼이라는 말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러는지 소라는 더 이상 농담에 끼어들지 않았다.나도 속으로는 「소라와? 결혼?」그러고 있었다.
〈아무데나〉에 앉아 삼십 분쯤을 게기고 있으니까 계희수가 입구에 나타나서 두리번거렸다.희수는 털이 달린 반코트에 흰 티셔츠를 받쳐입은데다가 청바지 차림이었는데,전에 없이 청순하고도 세련돼 보였다.어떤 선물이라도 내 손을 떠나기 직 전에는 아까운 법인 것일까.
내가 자리의 사람들을 서로 소개했다.희수와 소라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조성되는 것 같았다.둘 중 어느 한쪽이 분명히 처졌다면 그런 긴장감은 감돌지 않았을 거였다.윤찬이도 다른 때와는달리 매우 조심스럽게 굴었다.정말이지 왜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다들 작아지는 것인지 몰랐다.어쨌든 내가 싱거운 농담도많이 하고 또 거기 모인 애들이 다 그런대로 트인 애들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걱정마 희수야.윤찬이한테 니 과거는 일체 말하지 않았어.』내 말에 또한번 다들 킥킥거렸다.다만 희수만은,밝게 웃어대면서도 내 말에 담긴 암호를 파악했을 거였다.나는 진정으로 윤찬이와 희수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4월도 다 갈 무렵에야 나는 공식적인 미팅이라는 걸 경험했다.우리 국문과의 과대표는 윤칠식이라는 친구였는데,선거 때에는 당선 즉시 E여대생들과의 미팅을 담보로 과대표에 선출된 친구였다.그런데 지방에서 유학온 칠식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공약 실천을 요구하는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한때 과대표직에서 사퇴할 결심까지 했었다는 친구였다.
칠식이가 마련한 E여대 아이들과의 미팅은 5~6교시인 체육시간으로 수업이 마감되는 화요일 5시로 잡혀있었다.체육시간에 땀을 흘리고 가까운 목욕탕에 가서 몸을 청결히 한 다음에 다같이접선장소로 가기로 돼 있는 날이었다.체육시간이라 야 출석을 부른 다음에 학생증을 맡기고 공을 빌려서 농구나 테니스나 배구나그런 중에서 마음에 드는 운동을 하는 거였다.그날 따라 남학생들은 아주 활기차게 뛰어놀았는데,「설마」가 「역시」로 끝나더라도,희망이란 깨지기 직전까지는 사람 을 설레게 만드는 마술이었다. 게다가 나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미팅이었다.나는 형이 입던 홈스펀 상의를 세탁소에서 찾아와 차려 입고 학교에 간 거였다.칠식이가 비보를 가지고 체육관에 들어선 건 6교시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지도교수가 급히 학생들을 전원 면담 하겠다며학교에 남아줄 것을 요구한다는 거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