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서브프라임 ‘여진’ … 실물경제 뿌리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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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계 신규 수주 주춤, M&A 거래도 줄어 #미국 소비심리 위축되며 자동차 할부금융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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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클라우스 피터 오펜’은 한국 A조선사와 10여 척의 컨테이너선 발주 계약을 추진하다 최근 이를 포기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금리가 치솟으면서 선박 발주에 필요한 거액의 선박금융을 조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정부 투자 펀드인 ‘델타투’는 영국 3위의 수퍼마켓 체인인 ‘세인즈베리’를 인수하기로 했다가 지난달 이를 철회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200억 달러에 이르는 인수 대금을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파문이 실물경제에도 전염되고 있다. 증시·채권 등 금융시장이 냉각되면서 흡수합병(M&A)도 주춤거리고 소비·투자·생산·건설 경기마저 주춤거리고 있다.

◆“돈이 안 돈다”=러시아 모스크바 남부의 가리발디가 아파트 신축 현장은 공사가 중단된 지 두 달이 넘었다. 돈줄이 끊긴 건설사가 임금을 주지 못하면서 인부들이 공사장을 떠난 것이다. 건설사 측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해 공사가 중단된 현장이 한두 곳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서브프라임 파문이 ‘유럽 시장의 금리 급등→유럽에서 자금을 끌어오던 러시아 은행들의 자금 조달 비용 증가→러시아 내 대출금리 상승→건설사들의 자금난’이라는 연쇄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제조업계 상황도 어려워지고 있다. 미국 소비 심리 위축으로 세계 전자업계는 가격 할인을 통해 재고 관리에 나섰다. 항공·해운업계는 미주 노선의 화물 운송량이 줄어들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도요타 미국 법인 제임스 렌츠 사장은 “올해 자동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3% 감소하고, 2008년에도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몸살 앓는 지구촌=북극권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나르비크(인구 1만8000여 명). 한적한 이 항구도시의 카렌 마그레테 쿠바스(60) 시장은 요즘 밤잠을 설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상품에 투자했다가 6000만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인데 시청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월급도 못 주고 있다. 쿠바스 시장은 “올해 우리 도시에는 산타클로스가 안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돈 냄새’에 민감한 세계 M&A 시장도 움츠러든 지 오래다. 17일 시장조사 업체인 딜로직에 따르면 올 하반기 전 세계 M&A 거래 금액은 1조8500억 달러로 상반기보다 30% 줄었다. 2003년 이후 4년6개월 만의 첫 감소세다. 특히 사모 펀드를 통한 M&A는 2900억 달러로 상반기의 40%에 불과했다. 니혼게이자이(日經)신문은 “투자자들이 위험 회피로 돌아서면서 M&A 시장의 큰손인 미국·유럽계 펀드가 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어디까지 갈까=시장에서 돈이 마르면 실물경제도 어려워진다. 집값·주가가 하락하면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인다. 금융회사도 대출을 줄여 기업들이 돈 구하기도 어려워진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신용 불안이 자동차·학자금 대출에도 전염돼 일반 시민과 학생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금리 인하를 통해 서브프라임 파문 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유가 상승, 소비 감소가 겹치면서 세계경제에는 고물가·저성장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세계경제성장률 전망치를 7월과 10월 두 차례 내린 데 이어 내년 1월에도 하향 조정할 것임을 시사했다.

연세대 경제학과 성태윤 교수는 “서브프라임의 비중 자체는 미미하다”면서 “그러나 여기에서 촉발된 불안 심리가 세계 금융 시스템을 흔들고 실물경제의 발목까지 잡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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