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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의 인간순례 - 정상에 선 사람들 33] “노래는 감동 비즈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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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비행기 타고 미국에 갈 때 입국서류 직업란에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골라서 적는 사람이 있다. 아티스트, 싱어, 엔터테이너, 브로드캐스터, 토크쇼 호스트, 저널리스트, 라이터 등등…. 도대체 누구길래? 첫 직업이 가수인 조영남이다.


한 해가 저문다. 섣달, 그것도 땅거미가 질 무렵 목이 컬컬해지며 대포 한 잔이 생각날 때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릴 연예인은 누굴까? 그 중 한 명이 가수 조영남(62)이다. 그는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그림도 잘 그린다. 벌써 전시회를 30여 차례 했고, 그림도 꽤 팔았다. 그래서 자칭 ‘화수(畵手)’다. 그림을 그리는 가수란 뜻이다.

<조영남은…>

1945년 황해도 남천 生, 서울 용문고 졸업, 한양대 음대 중퇴, 서울대 음대(성악) 졸업,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사) 졸업
69년 ‘딜라일라’로 가수 데뷔
96년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수상
2006년~ MBC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진행
(히트곡)
‘제비’·‘딜라일라’·‘보리밭’·‘지금’·‘화개장터’·‘모란동백’
(방송)

<조영남쇼>·<임백천 조영남의 투맨쇼>·<체험 삶의 현장>·<조영남이 만난 사람>
(책)

<어느 한국 청년이 본 예수>(1982)

<넌 노래 부르지마>(1993)

<조영남의 양심학>·<놀멘놀멘>(1995)

<예수의 샅바를 잡다>(2000)

<조영남, 길에서 예수를 만나다>(2003)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2005)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2007)

<어느 날 사랑이>(2007)

그는 책도 쓴다. 올 9월에 낸 자전적 사랑과 여자 이야기 <어느 날 사랑이>가 화제다. 이 책만 쓴 게 아니다. 그동안 낸 게 벌써 10권이다. 그 중 미술 관련 책이 세 권이고.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도 될 분량이다. 이쯤 되면 화수가 아닌 ‘작화수(作畵手)’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참, 그는 방송도 진행한다. 타고난 재주꾼이랄 수밖에.

길가 은행나무가 잎을 다 떨군 늦가을 아침 조영남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올림픽대로를 사이에 두고 한강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서울 청담동 빌라에 산다. 현관에 들어서자 오선지에 음표를 그린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거실로 들어서자 시원한 통유리창 너머로 영동대교와 청담대교, 강 너머 아파트와 멀리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의 집은 618㎡(187평)로 연예인들 중에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시지가로 40억4,000만원, 시세는 100억원에 가깝다.

스튜디오 겸 화실로 쓰는 거실 오른쪽에는 그리다 만 그림과 화구·붓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왼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 잡았고. 이 집에서 다섯살 때 입양해 올해 고3인 딸 은지와 일하는 할머니, 그렇게 셋이 산다.

“어떻게 이런 집에 사는지 궁금하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플로리다에 살았는데 물이 보이는 집과 안 보이는 집 사이에 집값 차이가 엄청나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동부이촌동에서 세를 살다가 야간 일을 해 강이 보이는 흑석동 아파트로 옮겼고, 분당이 인기일 때 운 좋게 당첨됐거든. 그게 오르길래 팔아 다시 한강변으로 온 게지. 아파트 값이 올라도 빌라는 별로라며 다들 팔고 떠났는데 난 강이 좋아 붙어 있었지. 그러다가 다시 빌라가 득세하더라고. 재산을 늘리려면 너무 촐랑거려도 안돼.”

보통사람 같으면 비싼 집, 그것도 ‘연예인 중 1등’ 이라는 데 부담을 느낄 만도 한데 그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누가 그러더라고. 집 자랑하지 말고, 사진도 찍지 말라고. 아니 내가 17년째 이곳저곳 이사 다니다 여기가 좋아서 왔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사람들도 나더러 연예인 중 가장 좋은 집에 산다고 해서 ‘조영남 (방송에서) 물러가라’, ‘조영남 타도’ 그런 이야기 안 하더라고.”

부자는 자본주의의 꽃

그는 내친 김에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이야기 좀 하자”고 제안했다. 말(에 대한 해석)이 비뚤어지고 요상해지면 우리네 삶도 자동적으로 왜곡된다면서. 그 대표적 사례로 ‘부자’와 ‘친일’이란 표현을 들었다. ‘부자=투기꾼’, ‘친일=매국(賣國) 내지 배반’의 등식으로 보지 말자면서.

“아직도 부자라고 하면 막연히 반감을 갖잖아. 그 인식부터 바꿔야 해. 솔직히 자기도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 정작 부자인 남을 평가할 땐 나쁜 사람으로 보잖아. 그러면서 어떻게 자본주의를 한다는 건지…. 부자를 자본주의의 꽃으로 보자고. 그래야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조영남의 ‘부자론’은 이어진다.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일 수도, 학식을 높이 쌓은 사람일 수도 있다. 마음이 넓어서, 자식이 많아서 부자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부자의 긍정적 측면을 봐야 사회가 좋아지지 부정적 측면만 들쑤시면 사회가 삐뚤게 간다고 강조한다.

“모든 부자들이 나쁜 짓이나 투기를 해서 돈을 번 것은 아니잖아. 사회 현상이 다 그렇듯 좋은 부자와 나쁜 부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게지. 모든 부자를 감정적으로 대하진 말자고. 물론 잘못된 부자야 법과 사회 규범으로 다스리면 되는 것이고.”

그는 이어서 우리 사회의 왜곡된 개념을 원래 제 뜻대로 바로 세우자고 주장한다.

“‘가든(garden)’이란 말이 불고기 집으로 변한 것은 굳이 고치지 않아도 돼. 우리 생활을 크게 방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부자’나 ‘친일’이란 말은 원래 뜻대로 바로 세워야 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그래. 사회가 막 그래야 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 부자는 그저 부자일 따름이야. 부자를 있는 그대로 봐주자고. 사람이란 등 따시면 자연스럽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돼 있거든.”

평소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조영남은 장애 어린이나 불우아동 시설을 돕기 위한 모임이나 행사에 출연해 노래를 불러왔다. 또 매달 통장에서 일정액이 후원 어린이와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빠져 나가도록 해놨다.

그의 집안 곳곳에 그림과 조각 작품이 놓여 있다. 거실 건너편 서재는 두 면이 책장이고 미술·역사·철학·신학 관련 책이 즐비하다. 화장실에도 미술 잡지가 꽂혀 있다.

“그나저나 한강 다리를 왜 저렇게 두지? 멋있게 꾸미면 아트(art)가 될 텐데. 쇼핑몰과 카페를 열어도 좋고.”

거침없이 내뱉는 라디오 스타

그는 해방둥이다. 늙지 않을 것 같던 그도 환갑이 지났다. 염색해서 까맣게 보이지 이미 반백이다. 그 나이에 그 많은 일을 하는 열정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열정이라고? 그런 것 없어요. 재미 삼아 하는 거지. 그나저나 염색을 하다 보니 자꾸 머리가 빠져. 더 빠지면 아예 빡빡 밀어버릴까 생각 중이야.”

예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유쾌하다. 그리고 말에 거침이 없다. 꾸밈없는, 솔직한, 인공 감미료를 치지 않은 소리다. 이것저것 재고, 눈치 보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툭툭 내뱉는다. 그래서 일각에선 생방송으론 위험하다고들 했다.

그런 그가 2005년 정말 ‘대형 사고’를 냈다. 그 해 1월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을 냈는데 5월 중국과 한국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와 과거사 관련 발언으로 항일 시위가 번지던 무렵, 산케이(産經) 신문에서 조영남이 “일본이 독도 문제에서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가 쓴 책 제목대로 거의 맞아 죽기 직전까지 갔다. 결국 공개 사과를 했다. 돈줄인 방송·신문·잡지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연예인 생활 중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일본과의 아물지 않은 역사적 갈등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말인데…. 사실 그때 너무 잘난 척 한 거죠.”

그는 1년 반 만에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인공처럼 부활했다. 영화에서 솔직한 코멘트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퇴물 가수 최곤(박중훈 분)의 이미지와 비슷한 조영남을 MBC가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진행자로 복귀시킨 것이다.

“말을 자유스럽게 하니까 그전에는 불손하고 위험하다고 여기더라고. 이제 그걸 이해하는 걸 보면 시대가 달라진 거죠. 다시 마이크 앞에 서면서 그전과 다른 것을 배워요. 먼저 스스로 정제되는 느낌을 받지. 우리 정서에 맞춰 중심을 잡아간다고 할까? 라디오가 요구하는 내 모습에 행동도 따라가는 것 같고.”

내친 김에 그의 방송론을 들어보자.

“TV가 힘 깨나 쓰는 사람들의 매체라면 라디오는 보통 사람들 거야. 라디오를 해보니 TV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 한 마디로 TV보다 훨씬 인간적이야. TV처럼 일방적이지 않고, 점잔 뺄 필요도 없고, 솔직하게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는 최유라를 “여복이 있는지 운명처럼 좋은 여자를 만나 말년에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로 치켜 세운다.
 

“음대를 다녔지만 내 직업은 광대”

그는 한양대 음대(62학번)와 서울대 음대(64학번)를 다녔는데 정식 졸업장은 한 군데에서도 못 받았다. 특유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그는 학교 대신 무교동 뒷골목 음악감상실 ‘쎄씨봉’에 취해 다녔다. 학비를 벌기 위해 미8군에서 팝송을 불렀다.

그러다 1969년 알고 지내던 PD의 소개로 톰 존스의 ‘딜라일라(Delilah)’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녹음했다. 이게 심야 라디오 방송을 타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큰 인기였던 TBC 〈쇼쇼쇼〉에 나가 불렀다. 음대생이 아르바이트로 배운 유행가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듬해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시스터즈 귀국 공연에 MC 겸 초청가수로 초대받았다. 먼저 무대에 나가 ‘신고산타령’을 부른 뒤 김시스터즈를 소개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는 신이 나 노래를 시작했다.

‘신고산이 와르르르’ 다음에 ‘함흥차 떠나는 소오리에’가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가사를 바꿔 불렀다.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오리에에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 아우성을 치이누나아아 어랑어랑 어허야.”

느닷없는 ‘와우아파트 타령’에 객석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러나 그는 이 즉석 애드립 때문에 그날 밤 기관에 끌려갔다. 이때 병역 기피 사실이 들통났고 군대에 끌려갔다.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지만 서울대도 중퇴해 졸업장은 입학한 지 30여 년이 지난 뒤 명예 졸업장으로 대신했다.

제대한 뒤 74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에서 성가 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또 한 번 그의 운명을 바꾼다. 그 인연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광대라고 부른다. 그것도 DNA(유전자) 전체가 광대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임을 덧붙인다. 그래서 백수나 건달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그림 팔고, 노래 파는 게 다 뭐야. 대동강 물 퍼다 판 봉이 김선달이나 마찬가지지. 더구나 형태도 없는 것(노래)을 팔고, 별 밑천 안 들이고 물건(그림)을 파니까 경제적으로 보면 내가 재벌보다 더 성공한 사람 아닌가? 지 기분 좋고 돈까지 받으니 수지 맞는 장사지. 물론 그냥 돈을 버는 게 아니고 사람을 감동시켜야지. 노래는 ‘고객 감동 비즈니스’야. 요즘 고객이 얼마나 스마트하다고. 아무렇게나 해서 되는 게 아냐.”

사람들은 조영남 하면 ‘딜라일라’나 ‘화개장터’를 떠올리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시인 이제하가 작사겴方紵?‘모란동백’이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이 노래를 틀어주길 바란다.

“좋은 사랑, 나쁜 사랑 따로 없지요”

조영남만큼 하는 일이 많은 이도 드물다. 그의 말대로 ‘폼 나는 직업’이 여럿 있었다. TV 프로그램 진행자, 신문과 잡지 고정 필자, 그리고 방송 출연 가수와 현역 화가였다. 잘나가다가 ‘눈치 없는’ 친일 발언으로 한 큐에 백수가 됐다.

빈둥대던 그가 ‘놀면 뭐하냐, 멸치 똥이라도 따자’며 펜을 들고 쓴 책이 자신의 연애 이야기 <어느 날 사랑이>다. 그에게 사랑 경력은 미술도록에 실린 전시 경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책에 적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소회도 함께 썼다. 알게 모르게 마음을 아프게 한 이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

“출판사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망설였지. 그러다가 작가들이 시·소설·수필만 썼지 정작 자신에 대해선 직접 연필로 쓴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이상·김유정·정지용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들이 무슨 맘을 먹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잖아. 나혜석·천경자·전혜린처럼 여자들은 자신에 대해 썼는데 공교롭게도 남자들은 없더라고. 아마 멋대가리 없이 살아서,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밋밋하게 살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그래서 그 샘플이라도 보이자며 쓴 거지.”

그는 책에서 첫사랑, 풋사랑부터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바람 피운 일까지 모두 공개했다. 스스로를 (여러 명, 여러 종류의 여자를 사랑한) 카사노바와 (딱 한 명을 사랑한) 베르테르가 합쳐진 ‘카사테르’라고 부르면서.

성격 차이 때문으로 알려진 배우 윤여정과의 이혼 사유도 사실은 그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조영남답게’ 욕 먹을 부분도 많다. 여성과의 사랑만 쓴 게 아니다. 우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남성 간의 우정도 사랑이라면서….

“나쁜 사랑, 좋은 사랑이 따로 없지. 숭고한 사랑, 덜 숭고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없고. 육필로 쓰다 보니 60%밖에 못 썼어. 당사자가 살아 있으니 40%는 가려야겠더라고. 차라리 소설로 쓸 걸 그랬어. 그러면 실제의 80~90%를 썼을 텐데.”

윤여정에게 쫓겨났을 때 기어들어간 곳은 자신의 책을 낸 출판사 대표였던 소설가 조정래의 집이었다. 이혼으로 재산을 날린 뒤에는 소설가 김한길(현 국회의원)과 옥수동 월셋방에서 동거 생활을 했다. 이 무렵 3박4일 밤낮을 세우며 글 쓰는 법을 배웠고, ‘화개장터’는 이때 김한길이 작사해 준 것이다.
 

미술은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고교 시절엔 미술반 반장이었다. 가수가 된 뒤 다시 그림에 빠진 것은 군대 시절 만난 가수 김민기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서울미대생 김민기가 통기타를 칠 때 음대생 조영남은 그림을 그렸다.

오로지 독학으로. 73년 김민기의 도움으로 안국동 한국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 이후 서울·부산·뉴욕·LA··시모노세키(下關)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화가 조영남의 소재는 특이하다. 화투나 바둑판, 바구니, 태극기가 자주 등장한다.

“화투란 게 일본 오락이잖아. 일본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일본 사람보다 더 즐기니 이것도 모순이지. 학생들이 서양 포커를 하면 뭐라고 안 하면서 화투 치면 난리를 치고…. 이런 이중성을 고발한 거지. 남들이 안 그리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말이야.”

최근에는 코르크 병 마개, 음표 등으로 오브제를 확대했다. 그런 그가 올 여름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란 책을 썼다. 자칭 화가인 그가 보기에도 현대미술은 너무 어렵다면서. 그는 여기서 “미술이란 우리의 두 눈을 즐겁게 하거나 언짢게 하는 모든 것,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라고 풀이한다.

책을 마무리하면서 “머지않아 서울은 현대미술의 메카가 된다. 미술의 금메달은 언젠간 우리 차례다”라고 적었다. 그 근거로 ‘무대뽀 정신’과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직계 후예란 점을 내세웠다. 지나친 애국주의적 접근 방식이란 논란이 일었다.

“지구상에 우리나라만큼 미술대학과 미술학도가 많은 나라가 없어. 젊은 친구들은 도처에서 전시회를 열고, 팔릴 것 같지 않은 그림을 걸어주는 화랑들 열정도 대단하고…. 그 무대뽀 정신이 빛을 발할 거야.”

‘그림 그리는 작업은 밤낮 없이 해야 기술이 느는 낚시와 비슷하다’고 푸는 조영남에게 어느새 미술은 음악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조영남은 자신의 책 가운데 책다운 책 1호로 <예수의 샅바를 잡다>를 꼽는다. 한국에 교회와 기독교 신자가 그렇게 많은데 우리 시각과 역사적 경험으로 쓴 책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책을 읽는 것도 공부가 되지만 책을 쓰는 건 공부가 훨씬 더 돼. 옛날 사람들이 귀양 가거나 감옥에서 공부를 더 했다더니만.”

인가 안 받은 ‘청담중학’ 반장

▶88서울 올림픽 때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꼬인다. 만나면 재미있고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그리고 저녁 약속을 한다. 그는 어울려 밥 먹고 술 마시며 더드는 것을 좋아한다.

친일 발언 소동 이후 백수 생활을 할 무렵에도 툭하면 모여 수다를 떨었다. 그의 집이 있는 청담골(동)로 모여든다고 해서 ‘청담중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학교 교실에만 오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중학교’라고 하면 괜히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 ‘교’자는 뺐다.

처음에는 푼수 떠는 인간들이 다 모였다고 해서 ‘전푼협(전국 푼수자 협의회)’으로 부르다가 밀교를 차리면 대박 날 수도 있다는 의견에 따라 ‘재수(財數)교 총본부’(실력이나 노력보다 재수가 더 중요하다는 뜻에서)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덤협(둘이서 쌍으로 바보 짓 하는 것을 일컫는 ‘덤 앤 더머(Dumb & Dumber) 같다’에서 유래한 전국 덤 앤 더머 협의회) 또는 ‘전덤중학’으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모여서 재미있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한 친구가 초겨울부터 늦봄까지 내복을 입고 다니길래 ‘내복 착용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또 다른 친구가 교실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하도 흘끔거리길래 ‘여성 입장에서 남성 껄떡거림의 한계와 실용성에 관하여’를 논제로 택하는 식이지. 그러면서 낄낄거리고, 히히덕대고. 그렇다고 맨날 그럴 수는 없고, 여자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아 삐친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책도 쓰고 했지.”

조영남은 마당발로 통한다. 연예인들만 알고 지내는 게 아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계곀逵?문화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는 그를 ‘인간 복덕방’이라고 부른다. 신정아와도 전시회를 하면서 미술관에서 몇 차례 마주쳤다고.

“나한테도 학위를 검증하자고 시비 거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아무도 시비를 안 걸어. 졸업장이랑 앨범이랑 죄다 보여주려고 준비했는데 서운하더라고. 허허.”
 

‘재미이스트’로 살고 싶어요

그는 아침 6시에 일어나 딸이 학교 가는 것을 본 뒤 책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전화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점심 먹고 또 펜이나 붓을 잡다가 생방송을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향한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밥 먹고 술 마시고 떠들며 놀고…. 가끔 골프도 치지만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을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생일처럼 찌릿찌릿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어. 인생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자는 얘기야.”

조영남은 자유주의자다. 그 스스로 만든 묘비명은 ‘웃다 죽다’다. 그런데 친구들이 다른 묘비명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고렇게 재미 밝히더니 요 모양이 됐구나’라고. 이제 이순의 나이인데 꼭 해보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대뜸 “그것은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조영남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시인 이상이다. 그는 요즘 ‘내가 생각하는 시인 이상’에 대해 쓰느라 바쁘다. 내년 초 책이 나온다. 그동안 낸 책이 ‘장난으로 쓴 게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한길사의 요청으로 시작한 작업이라고.

“이상은 미술계의 백남준처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생각해. 보들레르나 랭보도 이상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해. 이상의 글을 읽으면 큰 별자리가 보인다니까.”

그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일어나 전화통을 잡았다. 점심 때가 됐으니 “민생고를 해결하자”며 뭘 시키겠느냐고 묻는다. 그와 기자는 퓨전식으로 짬짜면을, 젊은 사진기자는 잘 먹어야 한다며 잡탕밥을 시켰다. 경비에게도 먹고 싶은 것을 물어 배달하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는 과연 고객을 만족시킬 줄 아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알아서 자연스럽게 사진기자에게 여러 포즈를 취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웃옷을 갈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목련화’, ‘마이 웨이’를 즉흥 연주해 역시 시작은 가수란 점을 보여줬다.

양재찬 본지 편집위원 / 사진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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